니콘 D80 유감

from text 2006/09/06 19:49
니콘에서 D80이 출시되었다. D200 출시 때도 한동안 뻔질나게 SLR클럽을 기웃거리며 지름신과 조우하였지만, 그때는 가격도 가격인데다가 크기나 무게에 있어 나랑 맞지 않다는 명목 하에 빨리 지름신과 헤어질 수 있었던 반면(밴딩 노이즈 핑계도 있었지, 아마. 수준에 과분하다는 적확한 진단도 있었고), D80은 지를까 말까 하루에도 몇 번 씩 망설이게 만들고 있다. 한동안 드나들지 않던 클럽 신게에 다시 도장을 찍으며, 장터에 들러 D50 시세를 알아보는 게 주요 일과가 되고 있다.

D50을 능가한다는 JPG 화질에 넓은 뷰파인더(!), 더 커진 액정, ISO 100 지원, 기계적 조작 편의성 향상, 그러면서 여전히 작은 크기와 무게,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것만 같다.

기어이 사지 않고 버티게 만드는 건 딱 하나, 남들이 보면 별 핑계 다 댄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스트랩 연결 고리가 D200급 이상에 쓰이는 원형에 삼각 고리가 아니라 D50처럼 편평하다는 것, 그것이다. 몇 번만 어깨에 걸고 나다니면 고르고 고른 비싼 스트랩 망가뜨려 놓는 주범이 바로 그 편평하게 고정되어 있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조금 더 무겁더라도 마그네슘 합금 바디가 아니라는 점인데, 나는 맹세코 현재의 D80 수준에 삼각 고리 채택해주고 마그네슘 합금으로다가 바디 만들어주면 바로 질러 버리겠다. 케헴. 아니 사실 그냥 플라스틱에다가 삼각 고리만 달아주어도 질러버릴지 모른다. 물론 가격대는 지금 수준 아래에서 동결건조하고 민머리는 조금 다듬어준다면 말이다. 핑계는 내 인생, 나를 지탱케 하는 건 팔할이 핑계, 뭐 그런건, 아, 아니고, 아아.
Tag // ,

잘 가라, 여름

from photo/D50 2006/09/03 21:20
이제 시원해졌단 생각만 갖고 나섰다가 더워 혼났다. 그래도 싫거나 짜증나기보단 볕이 좋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올해는 마지막으로 느끼는 더위이겠거니 생각하니 이렇게 너그러워진다.

희망교에서 신천을 따라 앞산 심신수련장까지 가려던 것이 덥고 배고파 그만 중동교에서 빠져나와 대동삼계탕에서 약닭 한 마리.

Tag //

가을 일기

from text 2006/08/24 06:55
나는 어젯밤 예수의 아내와 함께 여관잠을 잤다
영등포시장 뒷골목 서울여관 숙박계에
내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넣었을 때
창 밖에는 가을비가 뿌렸다 생맥주집 이층 서울 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가 더 붉게 보였다
낙엽과 사람들이 비에 젖으며 노래를 부르고
길 건너 쓰레기를 태우는 모닥불이 꺼져갔다
김밥 있어요 아저씨 오징어나 땅콩 있어요
가을비에 젖은 소년이 다가와 나에게 김밥을 팔았다
김밥을 먹으며 나는 경원극장에서 본 영화
벤허를 이야기했다 비바람이 치면서
예수가 죽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먹다 남은 김밥을 먹었다
친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없는 나는
아무래도 예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아 미안했다
어디선가 호르라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곧 차소리가 끊어지고 길은 길이 되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녀가 벗어논 속치마 위로 기어갔다
가을에도 씨 뿌리는 자가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불을 껐다
빈 방을 찾는 남녀들의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야윈 어깨가 가을 빗소리에 떨었다
예수는 조루증이 있어요 처음엔 고자인 줄 알았죠
뜨거운 내 손을 밀쳐내며 그녀는 속삭였다
피임을 해야 해요 인생은 짧으나 피임을 해야 해요
나는 여관 종업원을 불러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피임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겠다던 종업원은 돌아오지 않고 귀뚜라미만 울었다
가을비에 떨면서 영등포경찰서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때
서울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정호승의 시 '가을 日記' 전문.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다 말다 한다. 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권장로님과 대화 중 '낙샘더위'라는 말, 즉흥적으로 지어낸 말이지만 느낌이 좋다. 떨어지는 걸 샘내는 더위(이런 걸 보면 한자어는 이제 정말 우리말이랑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낙이 그냥 외로 우리말처럼 보이니 말이다). 삼월 개학처럼 학생들 개학하고 한 열흘은 덥다는 장로님 말씀에 대꾸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