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from text 2022/11/27 10:55
어릴 적 눈물의 고향이 그래도 생각해 보면 한 번쯤 날 미소 짓게 한 추억은 있을 거야
세상을 향해 나올 때 난 누굴 의지했나 땅거미 진 창가 별 하나 보여주던 그도 이미 떠난 사랑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이 세상은 보이는 곳 아니야 괴로워 말기 원망도 말기 아름다운 세상만 보기

세상을 향해 나가봐 넌 나를 의지하니 세월 빠르게 지나 우리의 마지막 남아있는 사랑까지
세상 다 아니고 멀지도 않은 너 하나 용서 못하겠니 외로워 않기 슬퍼도 않기 미웠었던 기억도 않기
오래전 그날처럼 초록 나무 이름 모를 꽃 하늘 구름 바람 눈부신 햇빛까지도 사로잡은 오후의 평화
눈물도 놓고 추억도 놓고 사랑했던 사람도 놓고

그래, 올겨울은 이 노래다. 2007년 발표한 심수봉의 11집 타이틀곡 오늘, 문득.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산사를 떠나

from text 2022/11/25 18:52
늙은 목어가 간다. 법당 건너 재 너머, 여기서 저기로. 지치면 잠이 단 법, 오래 지치면 영원한 수면도 두렵지 않겠구나. 그리움에 지치면 영영 잊기도 한다니, 긴 꿈에서 깨어 긴 잠에 들면 꿈이 무어고 잠이 다 무어랴. 찬바람 한 번에 간밤의 국화도 색이 바랬다. 절간 돌절구에 살얼음이 끼고 운판은 저 혼자 울었다. 덧없이 가노라만 어찌 너나 나만의 일이랴. 모퉁이마다 마른 물고기가 걸렸다. 빈속에 마른잎을 채웠다. 돌아갈 길 없구나. 법고와 범종이 따라 울었다. 마른풀에 꽃이 피고 산새가 날았다. 너와 누운 자리였나, 먼일처럼 눈발이 날린다.

만추

from text 2022/11/13 07:45
토요일 저녁, 늦가을의 길거리는 온통 낙엽이었다. 상가들은 불만 밝혔고 아무도 없었다. 이천동과 봉덕동의 경계, 바람도 없이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11월 중순에 이렇게 포근한 날이 있었나. 많은 잎을 단 나무들이 많은 잎을 떨어뜨렸고 떨어진 잎들이 눈처럼 쌓였다. 한 쌍의 새가 버즘나무 이파리를 피해 노란 무덤으로 날아들었다. 부리를 비비며 인연이란 게 있을까,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는 멀리 날아가려마. 나는 무덤을 파헤치듯 길을 내 새를 쫓았다. 기다리는 이에게 기다리지 말라 일렀다.

* 더러 서너 잔을 먹은 때가 없지는 않다만, 어쩌다 한두 잔만 먹겠다는 결심을 잘 지키고 있다. 그런대로 오래오래 갈 수도 있겠다. 식구야 논외로 하고, 늘 그렇듯 조금의 일탈이야 없으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