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산 잣나무 숲

from photo/etc 2023/09/10 17:06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이 난다. 죽음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만큼 확실한 게 없고 죽음만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삶은 불확실하고 그만큼 명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이미 진 낙엽과 이제 지는 낙엽이 가는 세월을 논한다. 산성산 잣나무 숲에는 여린 빛과 이른 고요가 있고, 시절은 늘 수상하나 세월은 끄떡 않는다. 언제나 산은 말이 없고 산을 닮은 나무들만 노래한다. 남은 광기를 주체하지 못한 어떤 중생은 제자리에 고꾸라지기도 한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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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에서

from text 2023/08/26 09:02
누가 나를 대속할 수 있으며, 내가 누굴 대속할 수 있으랴. 내가 너를 정관할 때 물색 고운 너도 나를 정관하고 있었구나. 배롱나무 꽃잎이 내를 따라 나란하다. 저기 어디 산새가 날았던가. 전신이 따갑더니 가벼운 정신에 근육이 붙는다.

다 잊었으니 꿈에라도 울 일 없어라.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을 알 길이 없고, 내세와 윤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구나.

짧은 여름이 가고 이제 더 짧은 가을이 오겠지. 다른 계절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음 세상은 다음에 만들 터. 백로, 왜가리가 생각처럼 섰고 청둥오리가 졸졸졸 물소리를 따라간다. 코스모스와 루드베키아가 만발한 길에는 누가 버린 기억들이 있다.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과 꿈의 조각 같은 것들이 있다. 어제의 배롱나무 꽃들이 내를 따라 흐른다.

유두절

from text 2023/08/02 16:15
속죄하는 마음으로, 허나 결코 달게 받지 않겠다는 정신으로 걷고 또 걷는다. 상류를 향해 용두교에서 가창교에 이르는 길에는 이미 가을이 묻어 있다. 다른 세상인 듯 끄트머리 어디쯤에는 옛 마을의 정취도 있고 함께 뛰어노는 애들도 있다. 지구만 한 보름달이 당산나무에 걸렸구나. 어지럽고 고즈넉하여 잠시 멈춰 섰다 돌아서 다시 길을 걷는다. 지나온 길이 길이 아니구나, 내가 내가 아니구나 하다가 나도 따라 어디 다리 밑에 걸린다. 얼쑤, 굿춤 추듯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