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from text 2022/08/29 19:47
비 오는 날 너를 한입 베어 물면 어쩌다 복숭아나 자두 한쪽에서 느꼈던 벌레 덜 먹은 맛 같은 것이 난다. 쪼로롱 산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초록 위 배롱나무 붉은 꽃이 나를 맞던 새색시 같다. 며칠 전 꿈에서는 난생처음 대여섯 살 난 딸을 만났다. 보고싶었더냐 묻는 말에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손을 잡고 오래 걷기도 했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깨고 나서도 한 이틀은 실제 같았다. 비 오는 날 산을 한입 베어 물면 벌레 덜 먹은 것 같은 맛이 난다. 빗방울에 반짝이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오래 못 만난 내 딸만 같다.

* 배롱나무 꽃이 지면 가을도 더는 갈 길 없겠다. 남은 여름이사 숨을 곳 모르랴. 몇 번이나 남았을까. 기약 없이,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from text 2022/07/26 12:41
이제 나는 이게 별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런 나이가 되었고 그럴 나이가 되었다.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설령 일어나도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른다. 별 게 아닌 것이 별 게 아닌 게 아니었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애당초 별 게 아닌 게 아닌 일은 없었다.

한창 술이 좋을 때는 숙취도 좋았다. 이제 술이 별 게 아닌 지경에 이르니 숙취가 별 게 아닌 지경에 이르지 못한 조홧속이 새삼스럽다.

여름이 가고 있다. 나중 일이라 여기지 마라. 이제 너를 아쉽지 않게 배웅하고 종내 기꺼이 마중할 참이다.

세상에는

from text 2022/07/12 11:11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이미 어디 망가져 버린 걸까. 몸을 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하거나 지칠만큼 지칠 때면 안다. 세상에는 가소롭지 않은 일이 없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없다. 여름 신명도 있을까. 모르면 없는 것과 진배없으니 여기 물정이 이리 어리석다.

다음은 장자 제물론편에 나오는 장오자의 말 중 일부. '내 어찌 삶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미혹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나 돌아갈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그리고 인간세편에서 공자의 말 한 대목. '걸음을 멈추고 가지 않는 것은 쉽지만 걸어가면서 땅을 건드리지 않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