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바람에

from text 2024/02/17 16:42
겸손하고 염치를 알며 약간의 위악에 위트와 직관을 겸비하고 있다면 더불어 놀 만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배려하며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희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살다 보면 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해가 되기도 하고 해가 되던 것들이 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답이 되기도 하고 답이 되던 것들이 답이 되지 않기도 한다. 뻔한 정답이나 어려운 해답도, 이해나 손해도 다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 나지 않는 것이 절반, 쓰잘데기 없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구나. 이제 지난날은 그저 다 지나간 것일까. 지날 날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이제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산에 올라, 너를 생각하며 울었다. 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울고,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마저 울었다. 짧은 바람에, 마른 가지가 저 혼자 떨어졌다.

흔들흔들

from text 2024/01/15 22:05
인생이 늘 알 듯 모를 듯하더니 언젠가부터 어제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알 듯하던 것이 무언지도 영 모르겠다. 당최 현실감이 없고 이게 나인지 여기가 내가 사는 세상인지도 확실치 않을 때가 있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눈이 꽤 왔나 보다. 오를 때 멀리 드문드문 보이던 것이 하산길 응달에는 온통 하얗게 굳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뭘 좀 생각하다가는 변을 당하기 십상이겠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와 산 아래를 빙 돌았다. 어디든 바로 가기 싫어 더 멀리 돌았다. 지치면 주저앉을까. 앞발로 뒷발을 끌고 뒤꿈치로 땅을 밀었다. 가 버릇하면 또 간다고, 엎어질 듯이 자빠질 듯이 흔들흔들 걸었다. 그렇지. 늘 알 듯 모를 듯하던 것은 알든 모르든 별 게 아닌 거였다. 대저 내가 흔들거나 흔들린 것일 뿐.

따뜻한 겨울

from text 2023/12/13 20:06
정수를 두어야 한다. 얕은 수를 두거나 스스로 속여 봐야 헛일이다. 한 수 한 수 바르게 놓고 기다리는 것, 그게 정석이다. 채우기 전에 그릇을 키우듯 길게 보고 크게 보고 가야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생각보다 짧아도 길게 보고 가고, 그릇이 조막만 하여도 크게 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상 고온에 비도 봄비처럼 내리더니 교정 곳곳 목련마다 전구 같은 꽃망울이 맺혔다. 다시 비가 오고 추워진다니 어느 해 겨울처럼 피지 못하고 질 모양이다. 아마 그해 겨울처럼 가없는 우주 어딘가나 다른 우주 어디쯤에서 활짝 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