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from photo/etc 2022/07/04 20:08
딱 한 번 길을 잘못 들거나 어쩌다 한 번 발을 헛디뎠을 뿐인데 돌아가는 길도 가던 길도 찾을 수가 없구나. 하긴 메뚜기도 한철이고 사랑도 한때라긴 하더라만. 도시의 동쪽 끝, 열기로 가득한 거리의 작은 벤치에 앉아 형형색색으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하다 무엇을 하지 않느냐. 여기는 어디고 거기는 어디냐.

장자 소요유편에 이런 말이 있다. 요의 천하 양도 제안에 대한 허유의 답이다. '뱁새가 깊은 숲에 깃들여도 한 개의 나뭇가지에 의지할 뿐이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그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오.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시오. 나는 천하가 쓸데가 없소. 요리사가 음식을 잘 만들지 못한다 해서 신주(神主)가 술단지와 도마를 뛰어넘어가서 대신 음식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오.'

지난달 거실 화분에 키우는 호야에 처음 꽃이 피었다. 둘째가 초등 저학년 때 학교에서 가져왔으니 오륙 년 만이다. 꼬박 사 년이 지난 수조에서는 바닥재를 몽땅 들어내는 대공사가 있었다. 새로 장만한 갤럭시 A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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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칼립투스

from text 2022/06/03 13:50
봄이라 라일락이나 아까시꽃이 만발하거나 어쩌다 잘 차려 입은 여인네가 분내 날리며 스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함께 속내 나눌 사람이 그리워 더 멀리 걷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한때 시커먼 속내 몰래 나누던 누군가를 생각하기도 한다. 공기에 열기가 절반, 수분이 절반. 어차피 가뭇없을 일들이 새삼 새삼스럽다. 서사가 없어도 다툴 정분이 없어도 그 향내, 그 분내 속에 글쎄, 사는 게 조금 하찮기도 하고 조금 겁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봉덕동 유칼립투스. 늘 블루스 음악이 흐르고 자는 시간 외에는 마셔야만 할 것 같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여섯 개 정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초상이 있고, 마른 꽃이 걸린 한쪽 벽에는 유칼립투스가 그리스어로 덮여 있다 혹은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고 코알라에게 신경안정제 역할을 하며 꽃말은 추억이라고 적혀 있다. 잔뜩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데가 아닐 수 없다. 안주는 대체로 치즈나 과일 몇 조각. 어쩌다 봄이면 주인장이 장만한 옻순이나 가죽순을 맛볼 수도 있다.

여름이 내려앉은 밤거리는 아무렇게나 울고 노래하는 취객을 허용한다. 서로는 서로 분내 같은 추억만 남기고 가뭇없이 가버린 사람처럼 안부를 주고받을 뿐.

제대로

from text 2022/05/11 12:32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의 길 전문. 1936년 잡지 조광에 발표되었으며, 1992년 깊은샘 출판사에서 시, 수필, 시론을 묶어 같은 제목의 책으로 펴내면서 당시 맞춤법에 맞게 실었다. 수필로 쓴 것을 시로 많이들 혼동한다고 하는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모처럼 글 한 편에 온 몸과 온 마음이 저렸다. 이즈음 파친코에 이어 나의 해방일지에 푹 빠져 있으며, 이 정부에 주류세라도 안 낼 고민을 하고 있다. 황폐한 마음을 달래느라 많이 소홀하였다. 좋은 핑곗거리도 있으니, 다른 즐거움도 찾고 몸도 좀 가꾸어야겠다. 제대로 버티고, 제대로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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