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잠깐

from text 2022/05/04 08:55
어제, 휴가를 내고 모처럼 산에 올랐다. 늦게나마 진달래 군락지를 볼 욕심에 화왕산을 고르고, 무릎에 무리가 갈까 완만한 길을 찾아 옥천매표소에서 임도를 타고 옥천삼거리를 지나 정상으로 올랐다. 정상 부근 너른 평원에 진달래는 다 지고 금빛 억새만 장관이었다. 언젠가 가을에 은빛 억새밭을 본 기억이 어슴푸레하였다. 다섯 시간을 오르내리고 마침 창녕 장날이라 장 구경을 하고 송화버섯, 두릅, 제피 등속을 샀다. 시장 어귀에서 수구레국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내친 김에 우포늪을 찾아 오래 걸었다. 해지는 풍광과 아까시 꽃향기가 좋았다. 돌아와서는 하산주로 방천시장 인근 동곡막걸리에서 모듬전에 막걸리를 한잔하였다.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집이었다. 0124님 덕분에 하루가 온전하였다.

지을 작(作)은 사람 인(人)과 잠깐 사(乍)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이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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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from text 2022/04/04 11:14
다른 삶을 살았다면 룸펜으로 살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용기가 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 떨어진 낭만이나마 비굴하지 않게 한 세상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정 많은 사람들을 만나 영 굶주리지는 않았겠지. 한때 룸펜 같던 삶과 그 정신의 한 자락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다가오지 않는데 다가갈 일 없다. 자꾸 오락가락하는 건 나이와 술 탓이겠지. 다 부질없다가도 다 붙들고 싶기도 한 것이.

파국 이후

from text 2022/03/28 13:50
육 개월이면 사라질 감정이어도, 더는 특별하지 않아 다시 볼 수 없을 사람이어도, 행여 어떤 후회가 일어도 멈추거나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상처를 훈장처럼 가슴에 단 채, 파국 이전에는 무얼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다. 흉터처럼 남은 사랑은 때가 되면 다른 흉터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지만, 상처를 만드는 통쾌함과 아무는 가려움을 잊지 못한다. 여전히 멈추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파국 이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매화가 지고 목련이 피었다. 서양수수꽃다리는 새잎을 내밀었다. 어김없는 반복에도, 노인은 졸고 아기는 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오고, 가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