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전선 위의 참새

from text 2014/08/14 17:14
헐하고 허름한, 공중부양으로 하루를 견딘 우리가 지친 해를 위로하는 저녁,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농담, 흘러간 가락에 비틀거리는 술잔, 무너지는 마음, 오지 않을 사람, 가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욕망, 중독처럼 피어나는 열꽃, 회한과 미련, 적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처럼, 부서지는 운명처럼, 주인을 닮은 술집.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며칠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굴곡 없이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새옹지마 같은 세상, 모쪼록 전화위복이 되기를.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없는 갓끈도 고쳐 매지 않기를. 종일 비가 내린 하루, 방앗간 전선 위로 간다.

천천히

from text 2014/07/30 13:33
어딘가 단절된 곳에서 한 몇 년, 적게 먹고 조금 걷고 그저 숨만 쉬다 왔으면 좋겠다. 비라도 주르륵 내리는 날이면 냉큼 무언지 모르는 것이 그리워 술이라도 찾아 힐끔거리겠지. 더러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어름이면 큰아이는 기리를 깨쳐 대성하여 있을까. 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세상을 연마하고 있을까. 재롱 많은 작은아이는 어떤 사람을 만나 세상을 알아가고 있을까.

지난 주말이었다. 마른장마의 막바지, 구룡포읍 구평리 해변에서 짙은 해무와 차가운 바람을 맞는 호사를 누렸다. 해무가 맺혀 솔가지에서 물방울이 들을 정도였다. 분위기를 주체 못하고 밤새 주도삼매에 들던 중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족히 십오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지네에게 오른발 발가락을 물렸다. 일행에게 잡혀 변기통으로 사라진 주황빛 지네는 불로 지지는 듯, 가시로 찌르는 듯 꼬박 두 시간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물린 사람을 술 마시기 전의 몸뚱이로 만들어 놓았다. 열네 명이 정오부터 다음날 오후 서너 시까지 내달린 와중에 가장 많이 마시고도 가장 멀쩡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놈 덕분이었으리라. 뒤에 생각하니 그렇게 황천으로 보낼 일은 아니었다. 바닥을 잘 살펴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제가 먼저 해코지하기야 하였겠는가. 길을 잘못 찾아든 제 탓도 없다 할 순 없겠다만, 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새로운 질서가 온다고 한다. 천천히, 나는 나의 질서를 지킬 따름이다.

시실리

from text 2014/06/10 16:22
오월은 여름이더니 유월이 봄이로구나. 일박이일 일정으로 고대하던 시실리엘 다녀왔다. 0124님이 모는 차로 처음 간 나들이, 애들이 좋아하고 운전에 믿음이 가 자주 다음을 기약하여도 좋겠다 싶었다. 공룡과 탁현이형의 여전한 모습도 반갑고 좋았다. 오는 길에는 가야산 야생화 식물원과 해인사에 들렀다. 해인사에는 사람이 넘쳐 그 옛날의 정취는 간 곳 없었고, 다만 늙은 나무들만 고요히 늙고 있었다.

대양을 떠돌다 온 준탱이, 이번에는 얼굴 한번 못 봤다. 중심 잃지 않고 잘 이기길 바란다. 녀석에게도 전한 말이지만, 지나고 보면 다 지나가는 일이더라. 뭔들 그렇지 않겠나. 다음은 최근에 읽은 이수태의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서 기억할만한 한 토막.

그러나 모든 진실은 그것이 진실로 옹립되는 순간에 가장 위태로운 구도에 빠진다. 하나의 진실은 더 큰 진실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진실을 안고 있는 것만이 장벽도 될 수 있다. 악은 폐쇄된 선이고 선은 개방된 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