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불휘

from text 2011/03/03 16:40
잃어버린 걸 찾던 때가 있었다. 먼 미래의 어느 날처럼 아스라한 그때, 이미 나는 한번 죽었다. 지난겨울엔 많은 눈이 내렸고, 가슴에는 묻는 것이 많아졌다. 오래 추웠고 지칠 무렵 찾아온 온기가 문득 반가웠지만, 꽃샘추위는 동병상련인양 밉지 않았다. 진광불휘(眞光不輝) 네 글자를 며칠 붙들고 있다가 황지우를 다시 만났다. 그의 말처럼 어느 날 나는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흐린 주점에 앉아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보게 될까. 그날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월은 삼월인가, 오늘은 낮부터 자꾸만 졸린다.

우화

from text 2011/01/29 11:57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토끼가 달렸어. 자기 굴 다섯 번째 입구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말이야. 마음에는 다섯 개의 별을 그렸지. 세상의 비밀을 이제 슬쩍 엿보았을 뿐인데, 간밤에도 몇 차례 달이 지고 너구리 굴에 잠자던 낙엽은 하늘로 올랐지. 때가 된 건가, 눈밭을 헤치던 토끼는 아가위 붉은 열매도 지나치고 추상같은 전령도 지나쳤어. 까무룩 잠이 들었나, 술이 달더라니, 환약 같은 기억들을 검게 내지르고 토끼는 그예 길게 눕고 말았대.

새로 튼 둥지에서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도 철이고 멀어도 갈 길은 가야 하는 것을, 남은 생과 지나온 자국이 칼바람에 살갗을 에는 양 마냥 시리다. 세상엔 머지않아 다시, 봄이 오고 꽃이 필 테지. 사이나 먹은 붉은 열매 같은 것이 목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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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마디

from text 2010/12/24 21:29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도 폭음과 시체놀이를 번갈아 하다보니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좀비를 닮아가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얼굴을 맞댄 대학 동기들 송년회 자리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한자리에만 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쓰린 속이 풀리면서 오랜 초조와 우울도 서서히 풀리는 것만 같았다. 거점과 지향에 대한 고민, 무시로 시공을 넘나들다 이차로 옮긴 자리에서 송아지의 한마디가 번갯불처럼 와 닿았다. 잊어버릴까 싶어 메모지를 얻어 적어두었다.

전선에 선 사람은 틀리게 마련이다. 마치 링 위에 오른 선수처럼.

그래, 이맘때를 기억해 두자. 돌이킬 수 없고 돌아오지 않을 빌어먹을 육 개월, 마디마디 깊숙이 새겨두자. 다음은 신석초의 바리춤 서사 첫 연.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 꽃이언만 /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 생각하면 갈갈이 찢어지는 내 맘 / 서러 어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