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 어디로

from text 2013/01/16 15:07
지지난 일요일 서연이와 함께 아이맥스 3D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았다. 지금까지 본 어떤 3D 영화보다 자연스러웠고, 언제 이만한 영화를 보았나 싶게 좋았다. 음식남녀, 결혼피로연, 쿵후선생의 이안, 예전에 그 영화들을 보고 어딘가에 그가 있어 중국인은 행복하겠다고 적은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랑웅도 떠오른다. 이안의 얼굴을 모를 때 난 그가 랑웅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했었다. 엊그저께 일요일에는 혼자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았다. 궁리할 지점이 많아 바로 한 번 더 봤으면 싶었다. 옛날 영화관 운영 방식이었으면 그럴 수 있었겠지. 그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와 올려다보던 넓은 스크린이 생각난다. 철없고 남루한 내 모습과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잘 마른 장작처럼 쪼개지던 진부한 인연들도.

어린 시절 추억으로 사다놓고 오래 방치해 두었던 완역본 셜록 홈즈 전집을 한 권씩 읽고 있다. 어린이용 추리물에 빠져드는 서연이와 같이 읽을 요량으로 집어든 것인데, 덕분에 이따금 하게 되는 나의 삶을 추리하는 재미가 더욱 쏠쏠해졌다. 담배, 코카인, 마차, 난로, 모자, 코트, 신사와 숙녀, 비와 안개가 서린 세계, 이대로 더 달려들어 저편 어디로 빠져나오면 무언가는 조금 더 달라져 있을까.

다음은 근래 탐독해 마지않는 고종석의 트위터에 조금 전 올라온 글. 김기협의 블로그와 함께 이즈음 제일 쏠리고 마음 가는 곳이다.

리처드 하인버그의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를 읽었다. JS, 이미 <녹색평론>에 세뇌된 바, 생태경제학 담론을 망상으로 보진 않는다. 이런 류의 텍스트들엔 등장인물들도 똑같다. 예컨대 도넬라 메도우스, 콜린 캠벨, 제임스 캔터, 피터 빅터 등. 그런데 어쩌잔 말이냐? 이런 식의 협박담론(진실일지라도)의 실익이 뭐냐? 이런 말을 들으면 호모사피엔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달라질 것 같은가? JS 생각으로는, 생태경제학자들의 처방을 따라도, 인류의 멸종을 그저 조금 늦출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늦춤이 인류 자신이나 지구(생태계)를 위해 꼭 좋은 일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냥 지금보다 자원의 배분과 부의 분배에만 신경을 더 쓰면서,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살다가, 먹을 거 다 떨어지면 멸종하자. 구질구질하게 발버둥치지 말고. 이러나 저러나 인류의 멸종 멀지 않았다. 존속하는 동안 동종끼리 되도록 사이좋게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자. 인류의 탄생과 멸종이라는 거, 지구 역사에선 한 순간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백년 뒤 멸종하나 만년 뒤 멸종하나 그게 그거다.

그리고 그간 옮기지 못한 서연이의 대회 참가 일지를 기록해 둔다.

5월 20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181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6조 25위(2승 3패)
6월 17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182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6조 17위(2승 3패)
7월 15일, 계명대학교 바우어관, 제12회 대한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대구지역 예선 유단자부 16강
7월 21일, 경주 위덕대학교 체육관, 제2회 위덕대학교 총장배 학생 바둑대회 최강부 4강
8월 18일, 포항 실내체육관, 제4회 영일만사랑배 전국 바둑대회 유단자부 8강
9월 23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185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6조 8위(3승 2패)
10월 6~7일, 문경여중 실내체육관, 제7회 문경새재배 전국 아마바둑대회 전국초등일반부 준우승
11월 10일, 포항 미르치과병원, 제8회 경북일보사장배 어린이 바둑대회 최강부 8강
11월 17일, 덕영치과병원, 제30회 덕영배 아마대왕전 어린이 부문 최강부 8강

12월 19일

from text 2012/12/22 16:16
12월 19일 저녁, 사계동행 친구들과 송년 모임이 있었다. 양과 대창을 구워 소주폭탄에 금상첨화주(금복주 위에 화랑을 더해 금상첨화라는데, 참소주에 화랑을 섞었다. 고결까지는 몰라도 맛이 괜찮았다)를 먹고, 자리를 옮겨 임페리얼과 금상첨화주를 먹었다. 자리를 옮길 즈음 대권은 결정 났고, 화나고 무엇보다 쪽팔리고 답답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달랠 길도 없이 평소처럼 술이나 진탕 먹고 뭐라도 주절주절거리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이런저런 농이 흘러 다니는 사이 앞에 놓인 술잔이 바빠졌다. 겉으로 유쾌하고 속으로 허물어지다가, 괜찮아요, 괜찮아요 누군가의 말 몇 마디에 즉각적인 위로를 받았다. 나는 한없이 약하고 작았고, 낯모르는 이의 말 몇 마디가 이렇게 따뜻하구나, 위로가 될 수 있구나 처음 알았다. 다음날, 그 느낌에 대해 되새김을 하다 평소 이해하지 못했던 프리 허그, 힐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실연 후유증마냥 텅 빈 구석은 여전히 빈 채로 있지만, 며칠 나나 세상이 조금은 달라진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김언수의 설계자들에서 밑줄 그었던 몇 문장.

그런데 왜 굳이 도서관이었던 것일까. 도서관은 이렇게 조용하고, 이곳에 가득 쌓인 책들은 저토록 무책임한데. / 일을 끝내고 마시는 저녁의 캔맥주가 시원함과 보상과 휴식의 느낌을 준다면, 아침의 캔맥주에는 쓸쓸함과 몽롱함과 부적절함 그리고 깊은 밤을 지나와서도 끝내고 싶지 않은 무책임에 대한 욕망이 있다. / 하지만 불행히도 인생은 침대 시트가 아니다. 과거건, 기억이건, 잘못이건, 후회건 어떤 것도 깨끗하게 빨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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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르기

from text 2012/10/26 15:29
인간만큼 비린 생물이 있을까. 그 비루함. 서로를 어르는 짧은 순간에도 그것은 새끼를 치고 자란다. 한때 사랑이 사랑인 줄 알았다. 어제는 지나간 한 해 한 해를 복기해 보았다. 이리 놓고도 저리 놓고도 스무 몇 수에서 막힌 수순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수순은 엉켰으되 반상의 절반을 메운 돌들은 남은 수순을 강제할 것이다. 가을, 타고 흔한 것들이 마른 볕에 제멋대로 나부낀다. 봄이 그리운가. 비린내가 구린내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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