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바다배

from text 2015/01/03 23:02
제3회 열린바다배 전국 어린이 바둑왕전 참가를 위해 서연이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저도 지난여름 이후 오랜만의 대회 참가였고, 나는 대회장인 한국기원에는 처음이었다. 건물 외관과 계단의 사진들, 대국실 전경이 최근 미생에서 보고 그간 몇몇 자료에서 보아 온 그대로였다. 2014년 전국 초등학생 랭킹 상위자와 한국초등바둑연맹 및 16개 시도협회 추천으로 모인 32명이 열띤 대국을 펼치는 동안 대국실 밖 대기실과 복도에는 여러 도장 관계자들과 학부모들이 서성거렸다. 표정과 몸짓은 제각각이었으나 내심은 같을 터, 아는 사람끼리는 안부와 격려가 오갔고 모르는 사람들은 애써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려운 경기이지만 기왕 먼 걸음에 16강 본선 진출만이라도 바랐으나 기대를 저버리고 2패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네 명이 한 조씩 더블일리미네이션으로 치러진 예선, 접전 끝에 두 집 반을 진 첫 판의 아쉬움이 컸던지(상대는 이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두 번째 판은 저도 영 기대 이하의 승부를 가린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 한참 풀이 죽어있더니 제대로 한번 바둑을 해보겠다는 각오를 밝히는데 이렇게 상기된 얼굴을 언제 보았나 싶었다. 한국기원을 제집 드나들듯 할 날이 있을까. 오면가면 눈이 침침하여 나이 먹는 걸 알겠더니, 승패에 일희일비할 일이야 아니겠다만, 갈 길이 멀고 아득하여 마음 둘 곳 모르겠다.
Tag //

어떤 마음

from text 2014/12/31 21:47
대저 어떤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억누르기도 한다. 누르고 눌러서 마음을 달래지만 누르고 눌러도 무뎌지지 않는 마음. 언제 그 마음이 꿈속에서라도 활짝 피어나기를, 일 년이면 열두 달 안타까이 수를 놓는다. 더러 얼룩진 마음을 말갛게 씻긴 채 팽팽한 줄에 널어 말린다. 그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올해를 그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오래오래. 한 해의 마지막 날, 짧은 시간 함박눈이 내렸고 고운 다짐이 내려앉았다.

차면 반드시 넘친다

from text 2014/12/29 19:38
대체로 그릇의 크기가 그 됨됨이를 결정한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그 그릇의 온전함이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어쨌든 이것의 부정적인 모습은 살아가면서 누차 확인하게 된다. 질투나 시기는 누구나 느끼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릇은 조막만 한데 욕심이 과한 인물은 큰일이라도 부여되면 기고만장하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제풀에 휘둘려 날뛰는 모습이라도 볼라치면 연민을 넘어 어떤 역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 모를 리 없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저만 세상을 가소롭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제 그릇을 알고 인생에 겸허한 인물을 만날 때면 그 크기를 떠나 한데서 물장구치며 노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많은 걸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다. 세밑, 오랜만의 포스팅에 이딴 걸 적고 있는 걸 보면 내 그릇도 옹졸하고 온전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만, 그렇다면 그릇의 성질은 때로 바뀌기도 하고 크기를 키울 수도 있는 것일까. 드문 일이로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돌아보건대 제 크기를 벗어난 어떤 일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키우기도 하는 까닭이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은 세상을 두렵게 볼 줄 알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겠지만.

노자 도덕경 15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에 차면 반드시 넘친다(영필일야, 盈必溢也)는 말이 있다. 본디 뜻이야 어떻든, 뭘 채우든 우선 그릇의 크기부터 늘리고 볼 일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이지만, 주석이 가리키는 노자의 말마따나 채우려 하지 않던지(불욕영, 不欲盈).

모처럼 늦은 저녁의 사무실,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나이가 든 탓인지 유독 몸이 추운 겨울이더니, 마음 맨 밑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따뜻한 기억이 올라온다. 주변이 온통 힘들고 아픈데 목도리를 친친 감고 가여운 사람 하나 모른 척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