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mm

from text 2012/08/23 18:42
나는 술을 따를 때 <그만> 하고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오. 술을 충분히 마시지 않겠다는 건 술을 마시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 아니겠소?

나는 입이 무거운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런 사람들은 대개 가만히 있다가 엉뚱한 시기에 엉뚱한 말을 하는 법이오. 말이란 것은 계속 사용하지 않고는 현명하게 쓰기가 어려운 것이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에서 새뮤얼 스페이드와 대화 중 캐스퍼 거트먼의 말. 집 앞 네거리, 쏟아지는 비에 신호를 기다리다 말고 한 처마 밑으로 들어가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출근을 잊고 싶었나, 길을 잃고 싶었나 모르겠다. 차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잘도 달리고, 사람들은 역전의 용사처럼 보였다. 조금 있자니 그 비에 둘째 녀석은 제 어미의 손을 잡고 신이 나 길을 건너고, 나는 그만 무언가를 슬쩍 빗물에 흘리고는 바짓가랑이에 비를 담고 멀리 걷기 시작하였다. 사는 게 시시해져 버렸다.

직녀에게

from text 2012/08/14 15:06
병영집체교육이란 게 있었다. 1988년 늦은 봄이었을 게다. 어느 밤, 동기생 한 명이 뭔가에 잘못 걸려 내무반장의 지시로 원산폭격을 하게 되었고 그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가 부른 건 막 우리들 사이에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직녀에게'였다. 곡조도 가사도 부르는 이의 음색과 제대로 맞아떨어져 내무반은 일순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고, 내무반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사태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어쩌다 한가인의 소주 광고를 보았다. 그립던 이미지와,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던 게 떠올랐다. 밤새 얘기며 술이나 노래를 나누는. 철마다 한 번쯤 볼 수 있다면 좋았을까. 아니 좋은 계절을 정해 한두 해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장악하지 못한 채 사태는 흘러간다. 맡길 뿐이다.

풍문

from text 2012/07/11 17:15
더위가 결정되었다. 소식을 들은 아내는 존재와 무를 덮고 소리없이 웃는다. 어느 저녁, 무심한 영혼은 정갈히 손톱을 다듬고 술을 마시러 나간다. 짐승이 사냥에 나서기 전에 발톱을 갈듯 잘 갈무리한 손톱을 전장에 내어놓는 것이다. 분지는 습도로 충만하고 술잔에는 저마다 가속도가 붙는다. 서로 침범하던 무리 일부는 상대의 영역에서 소리내어 운다. 풍문은 풍문에 그치고, 어떤 가슴은 그 자리에 거꾸러진다.

유월, 다시 둥지를 틀었다. 낯익은 곳이면서 낯설다. 장마 한가운데 모처럼 자판을 마주하고 있자니 묵은 것들이 눅눅하게 올라온다. 사무실 바닥에는 며칠 슬픈 가락처럼 검정왕개미가 잔뜩 출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