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건

  1. 마흔 2008/05/17
  2. 지리산 2008/03/30
  3. 긴 하루 2006/08/14

마흔

from text 2008/05/17 12:49
뭐든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나이, 일부러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이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을 되살려 기어코 소진하고 마는 나이, 어제
과음한 다음 날, 살진 짐승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온통 하얗게 바랜 채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만났다.
문득, 세상이 그렇게 작고 예쁘게 보일 수 없었다.
일상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과
여전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세상은 여전했다. 제 방식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정답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석양이 보고 싶다. 운명을 닮은 석양, 며칠 그것만 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을 꿈꿔 왔나 보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나 보다.
꾸미고 가꾸는 만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 채
편리와 일상을 버린 채
불가능을 두드렸나 보다.
철이 들면 단순해진다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놓질 못하겠다.

지리산

from text 2008/03/30 01:28
1박2일 지리산에 다녀왔다. 금요일 낮에 중산리에 도착하여 마음씨 넉넉한 부부가 운영하는 펜션(물소리 바람소리)에 짐을 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라는 법계사까지 올랐다. 흙길이 거의 없이 돌과 계단 투성인데다 연신 오르막이라 꽤 힘들었다. 겨우내 잘 걷지 않고 근래 마음은 마음대로 지친데다 몸은 몸대로 혹사시켰는지 일찍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 애를 먹었다. 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꽤 많이 보이던 진달래는 한 그루도 볼 수 없었다.

오르는 길 내내 경상대 사대부고 1학년 남녀 학생들을 마주쳤는데, 대부분 어찌나 인사성 바르고 활기차고 밝은지 우리 일행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침에 출발하여 천왕봉까지 오르고 내려온다는 이들은 1년에 한 번 소풍을 이렇게 온다니 인솔하는 선생님들도 그렇게 듬직하고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법계사는 삼층석탑 외엔 근래에 지은 것들이라 볼만한 게 없었다.

내려오자마자 목마른 차에 다섯 명이서 동동주 두 되 맛있게 나눠먹은 게 어설프게 취하는 듯 하더니 펜션 마당에서 삼겹살 구워 소주 열두 병 먹고는 모두들 일찍 취하고 말았다. 모처럼 반주 없이 노래도 한 곡씩들 불렀다. 맑은 날이었는데 어째 별 한 점 볼 수 없었다. 아침에, 남은 삼겹살을 넣어 끓인 김치찌개가 일품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예담참숯굴랜드에 들러 숯가마에서 기분 좋게 땀도 내고, 예쁘게 내리는 비도 맞았다. 대구로 다시 돌아가는 게 이리 싫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산을 오르내리며 땀과 함께 털어버린 어떤 것들이 번잡한 일상이 기다리는 곳으로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었던 것일까, 앞산 어부이씨에서 잡어회와 생아구탕에 곁들이는 반주가 달았다.

긴 하루

from photo/D50 2006/08/14 07:46
토요일 하루 재미있게 보내기로 마음 먹고 정오쯤 길을 나서는데, 이 녀석이 꼭 사진기를 가져가잔다. 해서 50미리 하나 달랑 챙겨 나섰다. 시원한데서 0124님 일 마치기까지 다섯 시간 가량 보낼 요량으로 이마트 칠성점으로 갔다. 메가박스에서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을, 한 이십분 가량 보고 잠든 녀석 덕에, 혼자 잘 봤다. 노래가 썩 괜찮았다.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정글나라 놀이방에서 잠시 놀다 0124님과 형수네 식구들을 만났다.

인근 송정동태에서 냉면이랑 동태찌개로 저녁 먹고, 형수네가 가기로 했다던 우방랜드로 나들이 갔다. 마냥 흥겹고 씩씩한 아이들과 무더위 덕에 지치고 힘들었지만, 뭔가 해낸 뿌듯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달래기 위해 자정 가까운 시간에 계전 돌계단 아래 HAMA 호프집으로 향했다. 시원한 맥주가 피워낸 난데없는 한밤중의 이야기꽃은 아줌마들의 의기투합으로 다시 이마트 칠성점 근처 형수네 집에까지 이어졌다.

복분자주 몇 개 비우고, 아이들부터 아줌마들까지 하나하나 잠이 들고, 동이 트는 걸 보고서야 형수도 나도 잠이 들었다. 멍한 가운데 아픈 속을 달래고자 들안길 바르미 칼국수에서 점심을 나누고 헤어져 돌아오니 오후 네시가 가깝다. 이래저래 휴가는 끝나고, 어디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듯, 피곤한 가운데도 즐겁고 따뜻하다. 근데 아무래도 나는 아직(?) 이 휴가가 나의 일상 같고 또다시 출근하여 일을 하는 게 특별한 활동 같으니,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