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이 일 때에는

from text 2024/11/19 18:05
겨울엔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에서 아직 몇년째 휴학 중인 절름발이 친구와 사나흘 술이나 마시면 좋겠네.

연탄불은 가끔 꺼지고, 입김이 서로의 얼굴을 가리는 흐린 방에서 산 넘어 동쪽에서 온 여인과 또 그의 젊은 애인과 실직한 후배와.... 이렇게 꾸벅꾸벅 졸며 양미리를 구우며 막걸리 병을 쓰러뜨리며 어떤 기다림에 온종일 귀를 기울이면 좋겠네.

술만 먹다가 죽은 후배 이야기를 하면서, 불운한 연애 끝에 죽은 여인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에서 헤어진 후 영영 소식 끊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 살아남아 양미리를 굽는 우리의 손등을 바라보리. 취해가는 인생을 바라보리. 아직 파랗고 선량한 가난과 비참을 바라보리.

그러나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이여, 절름발이 친구여, 이제는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겨울만 남았고나. 이름 부르면 곧 달려올 것 같은 우리의 가난과 비참만 남았고나. 고지서 같은 세월이, 독촉장 같은 인생이 쓰러진 막걸리 병처럼 도처에 나뒹군다. 아아,

팔십여 일 되었구나. 술을 멀리하는 동안 이상하리만치 술 생각이 나지 않더니, 류근의 이 작품을 보고 잠시 술 생각이 간절하였더랬다. 그래, 큰물이 일 때에는 물속에서도 수그리는 것이 상책이다. 어디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고 안다 한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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