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사진

from photo/etc 2024/08/31 10:58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중에도 며칠 부쩍 가을 냄새가 난다. 계절은 돌고, 우리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간 세일러 프로피트 캐주얼 M닙과 워터맨 까렌 F닙, 노트 몇 권과 잉크 몇 병, 펜 케이스를 추가하였다. 오랜만에 책도 몇 권 샀다. 무념, 응진 역의 법구경 이야기, 리처드 바크의 환상,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민병일의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당분간 뭘 더 들일 일은 없을 것 같고 기념사진 한 장 남겨 둔다. 이 세계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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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게 장땡

from text 2024/08/03 00:54
펜을 갖고 놀며 이것저것 써보다 여러 번 필사하게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하도 이뻐 옮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며칠 사이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 잉크와 미도리 페이퍼 패드, 고쿠요 노트 패드를 추가하였고, 몇 가지 만년필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년필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이웃한 필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모처럼 내가 가진 라이카 카메라와 렌즈들 근황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렌즈야 그렇다치고 카메라 시세가 너무 올라 깜짝 놀랐다. M6 복각판이 나왔다는 소식도 처음 알았다. 만년필은 꾸준히 새 제품이 나오고 있고 필름 카메라도 새로 나오는 마당에 몇 년째 냉동실에 잠자는 필름도 한번 깨워보나 어쩌나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가격의 기계를 들고 엉터리를 찍게 되겠구나. 아날로그와 아마추어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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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세상

from text 2024/07/28 09:18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안다. 카메라 본체보다는 렌즈가, 렌즈보다는 필름이 결과물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찍는 사람이나 현상, 인화 과정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나 렌즈보다 후처리 과정이 결과물에 훨씬 크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후처리 작업이나 필름 등에 신경을 쓰기보다 렌즈나 카메라를 살펴보고 구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짧게나마 만년필의 세계에 들어와 노닐다 보니 생각난 얘기다. 만년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필감과 결과물일 텐데 역시 펜보다 잉크가, 잉크보다 종이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취미 생활이란 게 그것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장비나 도구를 살펴보고 고르고 지르는 재미를 빼놓고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능을 떠나 관상을 목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으니.

여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여행의 즐거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등산 장비를 고르고 등산 코스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과정이 모두 등산 생활인 것처럼, 만년필 세상도 구석구석 살펴보고 노는 재미가 있다. 정착이 어려운 세상이다. 펜도 그렇지만 잉크와 종이에 이르면 어마어마하다.

0124님에게 맛을 보라고 카웨코 클래식 스포츠 EF닙(뽑기 잘못으로 M닙 추가 구매)과 여러 잉크 카트리지들, 사무실에서 쓰려고 파이롯트 라이티브 F닙과 카트리지, 컨버터를 샀고, 파이롯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구매대행으로 커스텀 헤리티지 912 FM닙을 주문하였다. 잉크는 이로시주쿠 월야, 송로, 산밤, 죽림, 그리고 디아민 이클립스를 추가하였고, 우공공방의 원목 트레이와 양지사의 디루소 메모 패드 리필용 여러 권을 구입하였다.

사진기를 만지거나 물생활을 할 때도 그랬듯이 큰 세상 앞에서는 기가 죽어 딱 괜찮은 보급기나 중급기 기준에서 만족하고 나름 즐길 걸 안다. 타고난 소심함과 옹졸함이 어디 가겠나. 더 대형이나 고급으로는 가지 않는 저항선이 있다. 지를 건 어서 지르고 천천히 즐기면서 새 세상을 누리리라.

다음은 필사하다 다시 만난 고형렬의 시 '중' 전문.

어떤 시인도 나에게 콤플렉스는 아니다
나의 콤플렉스는 오직 이들뿐이다
소 똥과 오줌으로 약을 삼으며
남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로 옷 해입고
똥막대기에 해골을 꿰 어깨에 메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자가 못되더라도
나무 안경을 쓰고 어느 산골에
오직 경 하나와 옷 한벌로 세상을 보고
가만히 살아가는 겨울산과 같은
중, 그 중이 왜 이렇게 부럽게 되었는가
오, 중이여 막대기 하나와 옷 한벌과
신발 한짝 모자 하나로 떠돌거나
한 방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중이여
육식을 하지 않으며 산속에 살고
바람 속에 잠이 드는 저 불굴의 중이여
내 생은 내 육신 속에서 죽어가
이젠 영영 다다를 수 없는 길이 되었는가
어떤 사랑도 꽃도 나의 적은 아니었다

* 타이핑 된 걸 필사하는 건 좋은데, 이 포스팅처럼 적은 걸 자판으로 두드리자니 예전처럼 즐겁지 않구나. 아날로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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