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

from text 2024/07/17 19:28
지난 삶을 생각하니 기억의 총량을 벗어날 수 없구나. 남은 기억이 지난 삶의 전부로다. 언젠가부터 더해지는 기억은 없고 잊혀지거나 지워지는 기억만 있다. 용서해 다오. 모자란 놈이 모질진 않았으나 미덥지도 않았겠다. 며칠 전에 보니 배롱나무 꽃이 피었더라. 죽으면 새로운 세계로 드니 설렌다는 사람도 있다더만. 모를 일이다.

근래 만년필로 글씨 쓰는 재미에 빠져 있다. 내가 가졌거나 가진 가장 격렬한 취미라면 걷기나 등산이겠고, 매양 잔잔한 재미에만 빠졌거나 빠져 있는데 고요한 것 하나 더하게 되었다. 우선 구입한 건 펠리칸 M215 F닙과 4001 블루 블랙 잉크, 클레르퐁텐, 미도리, 로디아 노트와 밀크 프리미엄 복사용지, 그리고 펜코 클립보드. 반야심경과 몇 편의 시, 도덕경과 장자의 어떤 구절들, 그리고 읽고 있는 책과 블로그에 인용하거나 끄적인 글들의 일부를 필사하였고, 글을 쓰는 이상의 매력에 빠졌다. 사각거리며 미끄러지고 맺혔다 마르는, 펜과 잉크와 종이의 변주, 그 세계에.

올 장마는 유독 길고 자주 많은 비를 뿌리는구나. 살아갈 뿐 기억하지 못하는 중생에게 기어이 기억의 습한 길을 안내하는 듯이.

늙은호박

from text 2024/07/08 21:02
지난해 구월 금호에서 얻은 한아름짜리 늙은호박, 있는 듯 없는 듯 주방 한 구석에서 오래 묵었다. 아무래도 상했지,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사 잘라본다. 상하긴 개뿔. 주황색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단한 두께 안이 불을 켠 듯 환하다. 노을보다 붉게 빛난다. 전도 부치고 범벅도 만들어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구수한 늙은 맛이 난다. 너처럼, 안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두께를 가져야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활활 타오르는 속을 갖고, 한결같이 잘 여물어야겠다. 속이 더 붉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낙화

from text 2024/06/26 19:46
추억이 서린 음악은 얼마나 위험한가. 나이가 들어도 마르지 않는 심장, 바닥으로 꺼지거나 허공으로 사라질 아득함이여. 한잔의 술은 얼마나 불온한가. 거짓 위안과 환상으로, 가는 이를 배웅하는구나. 저 꽃잎은 얼마나 위태한가. 다음 계절이 와도 다시 돋을 줄 모른다. 부질없는 낭만과 뜻한 바 비겁으로 일관한 생애, 비와 마지막 바람을 불러 치명을 완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