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속의 새

from text 2022/11/02 21:06
인간이 존엄할까, 인간은 존엄한가 묻는다면
존엄한 인간이 있고,
존엄할 때나 존엄한 때가 있다고 답할밖에.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니
참으로 덧없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병 속의 새는
병 속이 딱 세상의 전부가 아닌가 되물을밖에.

아버지의 역사

from text 2022/10/29 01:02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따뜻함과 해학이 있다. 남도 사투리의 정겨움 속에 어쩐지 슬픔과 아픔이 있으며, 물 흐르듯 읽히는 중에 저도 모르게 웃고 울게 된다. 웃으며 울거나 울면서 웃게 된다. 사람의 도리와, 사람이 무어며 사람이 산다는 게 무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글을 쓰겠다는 허망을 한때 치기로 알고 진작에 그만두기를 얼마나 잘했나 싶다. 어쩐지 마음이 시린 작중 한 대목.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어 물며 돌아오던 신작로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산들거렸다.

읽으면서 우일문의 시시한 역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았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역사가 될 오늘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내일이라고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진짜는 드문 법이다. 밤이 깊다. 자꾸 뭔가를 놓고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남루한 흔적들

from text 2022/10/25 18:48
고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한 아버지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 옷가지며 책, 노트, 소지품들을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 뒤늦게 어머니가 교과서 서너 권을 겨우 건졌다. 그날따라 이상한 살기 같은 걸 느끼고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 나는 골목길에서 기름통을 들고 오던 아버지를 보고 그대로 뛰어 달아나 나중에야 불탄 사실을 알았다. 그길로 친구놈 손에 끌려 마지못해 다시 집과 학교에 돌아오기까지 오십 일을 넘게 밖에서 생활하였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카드, 여러 습작물과 기록이 있는 노트, 각종 유인물들을 후미진 캠퍼스 한 곳에서 몽땅 태웠다. 당시로서는 잡힐 것을 각오하고 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불탄 것에도 무어 대단한 것이야 있었겠냐마는 역시 훗날 아쉽고 그리울 때가 많았다.

며칠 전 무얼 좀 뒤지다가 1992년 5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쓴 일기를 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나마 잠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줄기차게 술을 마신 일과 함께 비루하고 가련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독서의 흔적과 보아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오래 잊고 있던 서울과 부천에서의 생활, 좌골신경통, 잠시 취업한 동해프로테인, 성주 초전에서의 노가다, 제록스 영업, 이츠야미, 다시 학교를 다닌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그 사람들과 그 세계, 어쩐지 작고 여린 나를 볼 수 있었다.

술과 사람들에 얽힌 남루한 흔적들, 가끔 이 블로그의 지난 글들을 보며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래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어쩌면 나는 한때 다른 말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