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름이 다하지 않은 가을이다. 필시 언제 어디서 나머지 여름이 작열할 것이다. 팔월 중순의 한밤, 술집들이 다 익은 알밤처럼 출입문을 열고 있다. 어디선가 낯익은 별이 떨어지고, 일행과 헤어진 나는 떨어진 별처럼 아무렇게나 손님 없는 빈집으로 들어간다. 며칠 새 확 늙은 기분이다. 거짓말 같은 날씨, 마치 더는 읽을 만한 흥미로운 글이 없어 스스로 쓰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새로 술병의 목을 딴다. 번지를 잃어버린 삼덕동, 봄이면 그곳에도 연분홍 연분이 피어나겠지. 더운 흙은 제 기운을 못 이길 테고, 더는 갈 길 없는 너도 새봄을 핑계로 다하지 않은 꿈을 접었노라 우기기 좋을 테다.
비가 내리니 네 마음 잠시 엿볼 요량으로 술병을 연다. 취기가 오르기 전에 그치면 어쩌나, 잔을 드는 손보다 마음이 바쁘다. 늘 그렇듯, 네 마음은 잘 보이지 않고 너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인간을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했던가. 지구가 아름답지 않아도 우주는 아름다운 법. 이생이 비루하고 남루할지라도, 저생을 위해 손과 손에 붉은 실을 이을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너를 만난다. 흐린 기억 가운데 또렷한 눈동자 하나.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