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농담처럼

from text 2016/03/05 14:53
입춘 지난 지 오래고, 사무실 앞 매화는 절반이 만개하였다. 오래된 농담처럼 나와 함께 성장하였던 금언. 무엇에든 구애되지 말자고, 마침 비오는 날을 잡아 한잔하였다. 어제, 금주 칠십일 일째.

술을 안 먹는 동안 농반진반으로 주위에 한 얘기가 있다. 이렇게 간절히 봄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나 하는 것과 가능한 한 길게 기록을 세워 다시 도전할 엄두도 못 내게 하겠다는 것. 가장 많이 생각한 건 아마도, 다시 술을 마신다면 천천히 조금씩 즐길 수 있을까, 여전히 잦은 폭음을 하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조금씩 즐기되 그만한 일이 있는 어떤 날엔 대취하도록 먹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곤 내심 좋은 생각이라고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곧 그것이 술을 마시는 동안 내내 했던 허튼 결심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 파괴적으로 살지 말자는 다짐.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아도 진실하고 충만할 수 있다는 깨달음. 아이들에게 본을 보이고 믿음을 얻었다는 것. 갈수록 엉망인 세태에도 세상이 조금 더 예뻐 보인다는 것. 아무튼 무거운 짐 하나 던 기분이다.

여럿 궁금해 하더라만, 술을 끊은 이유는 별 거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 뭐 다시 먹는 이유도 같다.

러너

from text 2016/02/12 23:18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지 오십 일. 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린 금요일. 큰일 하나 치른 날이자 갈 사람과 올 사람이 있던 날. 이월에 이렇게 따뜻한 날이 있었나. 누가 조금만 더 찔렀으면 바로 술잔 위에 엎어졌을 거다. 한 번만 더 낚았으면 황천길이 빤히 보여도 덥석 물고 놓지 않았을 거다. 핑곗거리도 좋겠다, 내친걸음 한 일백 일은 채우리라던 장담도, 육십오 일을 버텼던 그전 기록을 갈아 보겠다던 욕심도 간단히 무너졌을 거다. 잘 참았다. 괜한 결심일 리 없다. 먼저 먹자기엔 영 계면쩍어 묵묵히 돌아오던 길, 반환점을 돈 장거리 러너가 된 기분이었다. 그만하면 되었든, 이제 시작이든.

촉루처럼

from text 2016/02/08 22:32
그럴 때가 있었다. 누군가 날 이해할 날이 올 거라고, 언젠가 나도 세상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던 때가. 여전히 죽음은 그에게 우주의 소멸일 뿐이지만, 나에게 그것은 어떤 생성일지 모른다. 우주에게는 다만 큰 슬픔일지도 모르겠다. 젠장, 믿는 걸 바라기보다는 바라는 걸 믿는 쪽이 된 건가.

어쩌다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보면 내가 저기 살고 있구나, 그저 촉루처럼 무너지기도 한다. 소멸 너머 무럭무럭 자라기도 한다. 불완전 연소의 꿈이 완전 연소일 리가 없다. 꿈을 꾸지 않을 도리가 없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