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음을 삼가고

from text 2015/10/02 09:52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지 십삼 일째였다. 종일 참하게 비가 내린 날이었다. 먹자는 사람은 많고, 날씨 핑계로 제대로 흔들렸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다 먹고 취할선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風淸)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신흠의 글이다. 다음은 정철.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0124님에게 두 글을 보냈더니, 잠시 후 도착한 답. 흉내 내어 써보았단다.

마신들 무엇하리
헛헛한들 어떠하리
다 녹도록 마셔봐야
숙취 말고 무어더냐

다 일리가 있고 그럴듯하다. 하매 좋은 계절이다. 폭음을 삼가고 반주처럼 즐길 일이다.

건강하고 꿋꿋하게

from text 2015/09/25 09:40
서연이 학교에서 도시락 데이를 맞아 사랑의 편지나 메모를 함께 전해달라는 선생님의 요청이 있다하여 간밤에 급히 쓴 편지.

서연아. 너를 처음 만난 날과 처음 글자를 읽던 날을 기억한다. 홈스파월드 찜질방 한쪽, 처음 우리가 논쟁을 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 어린 나이에 의견이 맞서자 제 논리를 갖고 다투는 게 대견하기만 했다. 학교에 들어가 일학년이 되었을 때, 계명대학교 바우어관에서 처음으로 바둑대회를 우승하고 달려와 우승, 우승을 외치던 모습과 기차를 타고 문경까지 가서 일박한 날, 연이은 우승을 마감하고 품에 안겨 울던 너를 기억한다.

어디 너를 기억하는 것이 그뿐이겠는가. 섬세한 감정선에 반짝이는 촉을 가진 아이. 네가 기억 못할 어린 날, 너는 유독 점잖은 아이였다. 아빠의 어린 날을 한 번씩 돌아보다 보면 불현듯 나를 닮은 너를 만난다. 반갑고 기쁜 한편 아빠가 갖지 못한 깊고 너른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한단다.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교유, 그리고 상상도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이다.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든 곱새기고 되돌아보며 꿈을 잃지 않길 빈다. 칼끝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것처럼 강한 자 앞에 당당하고, 너에게 손을 내밀듯 약한 자와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의 장점을 볼 줄 알고 언제나 겸허하며 나의 단점을 살피고 삼갈 줄 알아야겠다. 두루 친구를 만나되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날들과 그 사이 같은 어둠, 때로 달처럼 이지러지고 차오를 날들이 있을 거다. 네가 만날 미래가 부럽고 궁금하구나.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고, 너를 믿는다. 건강하고 꿋꿋하게. 사랑한다, 서연아.

가을의 바람

from text 2015/09/14 20:18
늙었다기엔 젊고 젊다기엔 늙었구나. 늙은 체 하기엔 아쉽고 젊은 체 하기엔 마음이 이미 따르지 않는다. 어느새 가을이라 가을의 바람이 불고 민달팽이도 제 집을 찾는다. 먹을 것을 잃고 검은 새는 길을 떠난다. 전신주가 기우뚱 수직을 눕혀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해는 다시 뜨지 않을 것처럼 그 끝에 걸렸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풍경이 흔들리고 세상도 한 살 더 먹는다. 저도 갈 길 없이 늙었으리라. 그날부터다. 낮에도 네 그림자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