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명을 기다리듯

from text 2015/07/09 16:21
몸에서 살 썩는 냄새가 난다. 알코올을 그리 들이부었건만. 그래, 이대로가 좋은 거다. 아쉬움도 그대로 두고, 그리움도 접어 두고.

다음은 최하림의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전문.

우리는 많은 길을 걸었습니다 아침이면 등산화 끈을 질끈 조여매고, 여름 햇살을 등지고 월령산을 넘어 꽃무덤에 이른 때도 있었고, 덕유산 아래 갈마동에서 눈이 내리는 저녁을 보는 때도 있었습니다 12월이 지나고 1월이 오면 중북부 지방에는 복수초들이 눈 속에 솟아오른다지만, 우리는 겨울 내내 방 안에 박혀 티브이만 보았습니다 다시 봄이 다가와 돌담 아래 민들레꽃이 피어날 때에야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와 실크 머플러와도 같은 햇빛을 목에 두르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강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거나 바람이거나 햇빛처럼 반짝였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수많은 모세 혈관들이 입을 열고 햇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버들강생이들도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폭포수와도 같은 소용돌이가 일었습니다 어떤 것도 정지하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 변화를 뭐라 말해야 할까요? 내가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나는 뒤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내가 뒤돌아보며 감정의 굽이를 돌아갈 때, 그대 모습은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Tag // ,

일상

from text 2015/06/17 16:53
요 며칠 출근 준비를 하거나 일을 하다가도 문득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즐겁게, 누구랄 것 없이 사이좋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전날이나 전전날 술이 덜 깬 영향도 있을 것이고, 최근 일상 같지 않은 날이 많아 더 그럴 것이다. 일터에 몇 년 만의 큰일이 있었고, 장조모께서 돌아가셨으며, 나라에는 이름이 무색한 전염병이 돌아 주변이 흉흉하다. 사람 사는 일이 한결같을 수야 없겠지만, 일상으로 살다가 일상처럼 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서연이는 제44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바둑 종목 참가로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제주도에 다녀왔다. 16강부터 시작하는 단체전 경기, 대구 남자 초등 대표팀은 대진 운이 비교적 좋았으나 8강에 머물고 말았다. 그래도 저는 상대팀 1장하고만 맞붙어 2승을 하였으니 아쉬운 대로 만족할 만 하였다. 남은 시간에는 같은 학교 선수가 참가한 탁구팀을 응원하고, 성산포와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온 모양이다. 용돈 갖고 간 걸 오로지 제 동생과 식구들 선물 사는 데 쓰고 비행기 연착으로 한밤중에 돌아온 녀석을 보고는 모처럼 아비의 시린 마음을 느끼기도 하였다.

춘몽

from text 2015/05/20 23:44
그만하면 봄날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낮 기온이 삼십 도를 오르내린 전날이나 다음날의 꼭 절반이었다. 일기예보를 비웃듯 종일 비가 내렸고, 기상청은 날씨를 중계하기에도 벅차 보였다. 못다 간 봄이 남긴 차마 마지막 봄밤인 듯 나는 애가 달았다. 오래된 어느 모퉁이, 기품과 위엄을 잃지 않고 이미 홀로 선 나무를 보았다. 잠시 흔들리던 물빛 줄기와 단단한 뿌리를 보았다. 아무렇게나 기대 그저 같이 흔들리고만 싶었다. 오래 흔들고도 싶었다. 가지 하나쯤 아무도 몰래 꺾고만 싶었다. 다음 세상일랑 없답니다. 살아서 다시 만나요. 계절은 감당할 것만 감당하였고, 가만히 가야금 섞인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밤이 저물고 있었다.
Ta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