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전정

from text 2015/02/26 21:29
근육을 써라. 관절과 뼈를 이용하라. 볕을 쬐고 염분을 섭취하라. 뇌를 움직여 몸을 이동하라. 시간을 붙잡고 공간을 장악하라. 너를 놓아라. 세포를 분열하고 꽃목을 꺾어 뿌리를 단절하라. 이면을 보라. 미래와 결별하고 과거를 분질러라. 반상에 돌을 놓듯 잔을 놓아라. 나를 차단하라. 수맥을 뚫고 천천히 길을 놓아라. 울고 싶을 때 울어라. 그리고 조용히 숨을 놓아라.

형법 제241조

from text 2015/02/26 17:55
1988년, 1학년 때의 일이다. 학내 농성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세 학번 이른 같은 과 4학년 형이 뜬금없이 간통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형은 무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의 하나였고 학년 차이가 있어 자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던 터였다. 나는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여 법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라고 답했고, 그 형은 여성의 지위와 대우가 상대적으로 낮은 우리 사회의 여러 풍토와 여건을 이야기하며 약자에 대한 옹호를 들어 그 법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자유주의적인 내 성향을 우려하여 일부러 꺼낸 얘기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회 속의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나아가 사회적 참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야 어디 갔을까마는 실제 그 이후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그 일의 사회적 맥락이나 힘의 관계 등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버릇이 들었었다.

헌법재판소가 1953년 제정되어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형법 제241조(간통)에 대하여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네 차례의 헌법재판에서 합헌으로 판단했다가 오늘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일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아니 훨씬 이전에 그 형도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고 지금의 헌재와 같은 판단을 내렸으리라. 1905년 공포된 대한제국 형법대전이나 1912년 제정된 조선형사령에서는 유부녀의 간통만을 문제 삼았다 하니, 법률의 역사와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모처럼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 앞 화단의 매화가 곧 망울을 터뜨릴 모양이다. 계절은 다 같이 누리는 것이겠지만 모르긴 모르되 차리는 놈은 따로 있을 테다. 몰래 가만히 준비하는 놈도, 스미는 것도 다 따로 있을 테고.

서녘 비골

from text 2015/02/14 17:10
낮달 떴으니 낮술 한잔 먹는다. 어디서 북 소리, 방망이 소리, 꽝꽝 무언가 가르는 소리. 허망한 꿈을 꾸었구나. 동녘 운산, 북녘 눈뫼, 서녘 비골, 남녘 유리, 어디로든 떠나고픈 마음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다시 펼쳤다가 비골에 한참 눈이 멎었다. 그렇지,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지.

바다가 있고, 산이 거기로 내려가다 발목만 잠그고 멈춰서 버린 저 비골에서는, 늘 젖고, 늘 울었지. 술에도 젖고, 생선 비린내에도 젖고, 계집 흘린 눈물에도 젖었더라구, 거기는 글쎄, 여덟 달간이나 비가 온다고 하잖던가? 남는 넉 달 중에서도, 청명한 날 찾기는 어려운데, 어쩌다 끼어드는 청명한 날은, 무슨 염병이나 간질병 같은 것이지. 그 여덟 달 동안의 젖은 바람은, 뼈마디마디에다 해풍과 습기와 관절염만을 불어넣는 것만은 아니라구 글쎄. 어떤 청명한 다음날에, 사람들은 자살을 해 버리지. 글쎄 어떤 사람들은, 무참히도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더라구. 비가 내리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줄기찬 법 없는, 저 습습하며 어두컴컴하고, 뼛속에 곰팡이가 피어 가는 저 모든 것을 상상해 보시란 말이지. 글쎄 겨울이란대도 혹독히 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가벼운 감기나 걸릴 정도인 것이며, 여름이란대도 무참히 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한번 더 감기나 걸릴, 그런 고장의 저 음산한 거리며, 낮은 추녀 밑에는, 언제나 웅숭그리고 있는, 썩는 듯한 어두움이며, 헌 가구의 냄새며, 개까지도 웅숭그리고 지나며, 나뭇가지도 뼈를 아파해쌓는, 글쎄 그런 고장을 상상해 보란 말이지. 그런 어떤 날, 느닷없이, 하늘이 그냥, 푸르게 엎질러져 버리고, 길이며 지붕 꼭대기들이 아주 낯설게 뻔적이는 것이오. 거기서 또 떠났구료 나는 엥, 그것도 자살은 아니었을까 몰라. 젠장 떠난 건 떠난 거니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