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면 반드시 넘친다

from text 2014/12/29 19:38
대체로 그릇의 크기가 그 됨됨이를 결정한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그 그릇의 온전함이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어쨌든 이것의 부정적인 모습은 살아가면서 누차 확인하게 된다. 질투나 시기는 누구나 느끼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릇은 조막만 한데 욕심이 과한 인물은 큰일이라도 부여되면 기고만장하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제풀에 휘둘려 날뛰는 모습이라도 볼라치면 연민을 넘어 어떤 역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 모를 리 없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저만 세상을 가소롭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제 그릇을 알고 인생에 겸허한 인물을 만날 때면 그 크기를 떠나 한데서 물장구치며 노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많은 걸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다. 세밑, 오랜만의 포스팅에 이딴 걸 적고 있는 걸 보면 내 그릇도 옹졸하고 온전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만, 그렇다면 그릇의 성질은 때로 바뀌기도 하고 크기를 키울 수도 있는 것일까. 드문 일이로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돌아보건대 제 크기를 벗어난 어떤 일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키우기도 하는 까닭이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은 세상을 두렵게 볼 줄 알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겠지만.

노자 도덕경 15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에 차면 반드시 넘친다(영필일야, 盈必溢也)는 말이 있다. 본디 뜻이야 어떻든, 뭘 채우든 우선 그릇의 크기부터 늘리고 볼 일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이지만, 주석이 가리키는 노자의 말마따나 채우려 하지 않던지(불욕영, 不欲盈).

모처럼 늦은 저녁의 사무실,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나이가 든 탓인지 유독 몸이 추운 겨울이더니, 마음 맨 밑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따뜻한 기억이 올라온다. 주변이 온통 힘들고 아픈데 목도리를 친친 감고 가여운 사람 하나 모른 척 지나간다.

첫눈 2

from text 2014/12/01 16:03
첫눈이 아주, 잠깐 미친년처럼, 도시를 습격하였다. 12월의 첫날, 바람의 척후를 앞세워, 잠복하던 마음들을 깨우고, 이후는 아랑곳없이. 호응하던 땅이 벌떡 일어나더니 더 깊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철모르던 목련 꽃망울이 다쳤고, 게걸음을 치던 사람들은 품었던 걸 슬쩍 설수에 녹였다. 소식을 전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이 없었다.

* 그 밤, 첫눈을 화제에 올렸더니 다들 아니라 하더라. 쌓이지도 않았다면서. 한참 우기다 돌아보니 나도 그랬겠더라. 당신, 만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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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죽은 노래를

from text 2014/11/18 23:48
형식이 내용을 추동하매, 나는 이게 슬퍼 가을도 겨울인양 술을 부른다. 술도, 비슷하거나 다른 연유로 술이 마른 이들도 나를 찾는다. 불렀으나 외면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게 더워 나는 거절이란 걸 모른다. 누가 있어 어느 날 문득 손짓할 수 있다면, 응답을 듣지 못한대도 나는, 마냥 어린 아이처럼 설레고 들뜰 테다. 오랜 옛날, 누가 얘기하는 걸 들었지. 경계보다 아찔한, 날선 작두를 타며 술과 죽은 노래를 나누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그 노래에 사랑을 안고 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살을 발랐고, 노래에 칼을 품은 사람은 여기저기 묽은 피를 토하였단다. 죽음이 영원하다면 이 노래도 영원하리라. 머리칼이 자라듯 영원히 자라나리라. 영원의 죽음과 죽음의 죽음까지, 죽음이 영원하다면 이 노래 또한 영원하리라. 뼈가 발린 사람도 피를 마신 사람도 함께 푸르게 타오르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옛날이야기는 옛날에 숨이 멈추었는가. 죽은 노래가 생각나, 올 가을도 술을 불러 낮게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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