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도 세상도

from photo/D50 2010/06/10 18:42
서율이가 탈장과 음낭수종으로 수술을 받았다. 입원부터 퇴원까지 2박3일 일정의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병원 문턱을 잘 드나들지 않는 우리로서는 큰일을 치른 셈이다. 중심가에 위치한 대학병원과 소아병동 6인실의 풍경은 인생살이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주었다. 짧은 시간에 아는 이들도 여럿 만났다. 첫날엔 자식을 먼저 보낸 한 어머니의 슬픔을 만났으며(이튿날에야 알았다. 늘 그렇게 착하고 고울 수 없는 분이었는데, 글썽이던 눈물과 아파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둘째 날 아침에는 수술실 앞 대기실에서 친구 녀석의 암 수술을 기다리는 그의 부인을 만났다(다행히 전이된 곳 없이 수술이 잘 끝나 저녁에 찾은 병실에서는 유쾌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의사로 있는 옛 친구도 만났다). 그리고 알은체를 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동아리 지도교사를 보았고, 송아지로부터 공룡으로 이어지던 끈을 타고 만수와 통화를 하였으며 종화형 소식을 들었다.

더 잘 먹고 더 잘 뛰어다니는 녀석을 보니 길게만 느껴지던 며칠이 언제 그랬나 싶으면서도 그 며칠이 이상스레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식게 만들어 어제는 일없이 또 술을 잔뜩 먹고 말았다. 피할 일이지만 그래도 그러고 나니 사람들도 세상도 조금 예뻐 보인다. 오월에 찍은 율이 사진 몇 장. 몸이 자주 속삭인다. 서둘러야겠다. 주변을 정리하든 나를 정리하든.

* 끈을 놓지 말 일이다. 특별할 것도 외로울 것도 없다. 적어도 3%가 우글거리고 있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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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ext 2010/05/30 01:08
보라, 결국 계절은 제자리를 찾았다. 잦은 바람에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누가 뭐래도 세상은 아랑곳없다. 별 탈도 뒤탈도 없다. 흥미로운 일도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그렇게, 건조한 미라의 가슴을 안고 이창동의 시를 보았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추리소설 몇 편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죄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펄펄 끓던 시절, 나에게도 앤톨리니 같은 선생이 있었거나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그뿐이었다). 직장에서는 어쨌든 10년 근속상을 받았고, 이날과 몇몇 핑계거리가 있는 날엔 많은 술을 마셨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다가 그게 무언지 몰라 주춤거렸으며 버릇대로 일찍 취해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부끄러움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저녁으로 한두 시간씩 서연이의 바둑을 보는 게 낙이라면 낙이다. 닭 모가지를 베고 자는지 잠도 꿈도 짧아졌고 무기력함과 건망만 늘었다. 젠장, 길이 있는데 길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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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

from text 2010/05/16 01:01
1박 2일 직장 연수를 떠난 0124님 덕분에 오롯이 서연이랑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토요일 저녁, 이런저런 궁리 끝에 신천 둔치에서 열린 노무현 1주기 추모 콘서트엘 다녀왔다. 여러모로 잡탕의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몇 차례나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처음 마주쳤을 때 선뜻 알은체를 못하여 끝내 인사도 못 차리고는 내내 이윤갑 선생님 내외분(임에 틀림없다. 두 분의 고운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옆에서 공연을 지켜보았다. 언뜻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프로파간다도, 아니 어떠한 순결하고 고귀한 신념이나 가치 체계도 구체적인 질감, 말하자면 '사람 사는 세상'의 사람 사는 모양을 넘어설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마지막 순서로 'Power to the People' 합창이 끝나고는 여러 핑계를 안고 집 근처 막창나루로 향했다. 그러나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을 섞어 먹는 동안, 토요일 밤의 고즈넉한 술집에서 한세상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빈자리엔 부자간의 정과 서로간의 투정만이 남아 있었다. 다음은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한 대목. 읽지도 사지도 않았지만, 이 블로그에 하나쯤 더 올려놓아도 좋겠다. 그의 진정이 애달프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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