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별, 바람

from text 2010/04/18 23:26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기발하고 기지로 가득 찬 문장들을 하나하나 쌓아 만든 그야말로 거대하고 중대한 농담 덩어리이다. 울적하거나 쓸쓸하고, 때로 사는 일이 한없이 허무하거나 어이없을 때, 지루한 나날에,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싶을 때, 언제라도 들춰보기 좋은 책이다(특히 우울증에 걸린 로봇, 마빈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200쪽이 넘는 합본호를 사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까지 700여 쪽을 단숨에(여러 번 나누어 읽었음에도, 그렇게 느껴진다) 읽었다.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젊은 자포드 안전하게 처리하다와 대체로 무해함은 남겨둘 생각이다. 보험처럼 넣어뒀다 언제든 필요할 때 써먹을 작정인 것이다. 사실 잘 알 순 없지만 줄곧 번역이 참 매끄럽고 좋다는 드문 느낌도 받았다.

박범신의 에세이집 산다는 것은이 좋았다. 오래전 연작소설집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보고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하였다가 이번에 또, 다시 보게 되었다. 늙는다는 것과 나의 삶에 대한 위안도 얻었다. 책장을 덮고, 조금 전, 흰 소가 끄는 수레를 꺼내 잠시 뒤적거린다는 것이 한 편을 다 읽고 말았다. 이번 에세이집과 여러모로 맥이 통하고 있었다. 서른에 읽었을 때는 무엇을 보았는지 좋게 본 기억만 있었는데, 이제 마흔이 넘어 다시 읽으니 폐부를 찌르는 듯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읽고 둔 책들이라도 간혹 꺼내볼 일이다.

그저께는 출항 일정이 잡힌 준탱이 녀석을 붙들고 밤새 술을 마셨더니, 깨고 보니 오늘인 듯 여태 멍멍하다. 요즘 들어 몸이 하는 말에 부쩍 귀를 기울이면서도 복명은 고사하고 복창도 아직 멀었단 말인가 싶으면서도 핑계거리도 줄었는데 어쩌나 하마 걱정이다.

이 봄

from text 2010/04/11 22:11
바랜 채 와서는 흔적 없이 기우는 이 봄, 왜 그런고 했더니, 설레지 마라 이르는 것이더라. 설렐 것 없다 굳이 타이르는 것이더라.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을지라도 멋진 문장을 만나 밑줄 하나 조심스레 긋는 것이, 다시 펼칠 일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책장을 덮으며 가슴 한쪽 여미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더라. 천만번도 더 이지러지고 차올랐을 푸석한 꿈, 놓을 자리 어드멘가.

어제 오전 준탱이, 서연이와 함께 앞산엘 올랐다. 충혼탑으로부터 산성산 정상을 거쳐 고산골로 내려왔다. 오르는 길은 완만하였으나 내려오는 길은 가팔랐다. 내심 첫 번째 만나는 약수터쯤에서 발을 돌리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흐리고 선선한 날씨에 서연이도 잘 걸어줘 모처럼 제대로 산행한 기분이 났다. 벚꽃은 개화가 늦었다지만 진달래는 이미 한창이었다. 고산골에서 족발과 닭 한 마리에다 동동주 한 되를 나눠 먹고 이른 취기를 달래며 신천을 따라 대봉교까지 걸었다. 서연이를 인계한 밤에는 동네 어귀에서 조용필의 베스트를 들으며 막창에 소맥으로 오지 않은 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 잔뜩 구겨진 달이 서둘러 지고 있었다.

율짱

from photo/D50 2010/03/2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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