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일째

from photo/D50 2009/08/23 16:08
183일째. 거의 배밀이 없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두 손 두 발로 버티기(엎드려뻗치기)를 여러 날 하더니 곧잘 기어 다닌다. 간밤엔 다들 잠든 사이 혼자 아빠,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제 형과 내가 자는 방을 향해 거실 절반을 가로질러 오기도 하였다(각방자리 육 개월이 넘으니 겪는 재미인지도). 새 책장과 좌탁 구입 기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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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리움

from text 2009/08/19 10:25
모든 게 아련하기만 하다. 이 여름은 누굴 닮아 지치는 기색도 없이 겨울처럼 아득하고, 어떤 그리움을 핑계로 또다시 퍼마신 날, 산도 들도 바람도 퍼렇게 멍이 들었었다. 다음은 정근표의 구멍가게 중에서 한 대목.

식이 아재는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렇게 돈을 맡겨놓고 뒤뚱뒤뚱 가게를 걸어 나갔다. 그런 식이 아재의 뒷모습에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을 밝히는 작은 빛을 보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끙끙거리는 아이처럼 한동안 식이 아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이 세상에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목다운 거목이 갔다. 이로써 거인들의 시대는 다 가버린 듯.

어느 날 어느 때

from text 2009/08/12 23:47
가을 하늘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그저 그것만으로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때는 없는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는 분수도
쓸쓸하게 가지를 떠나는 낙엽 한 잎마저
어쩐지 기쁨에 겨워 춤추는 양 보이는
그런 때가

유정 편역의 일본현대 대표시선에서 쿠로다 사부로오의 시 '어느날 어느때' 전문. 전세 계약 기한은 다가오지만 어째 나갈 일은 멀기만 하여 이사 이후로 미뤄두었던 집안 정리와 재편을 감행하였다. 거실에 있던 TV와 홈시어터 시스템을 없애고(TV는 중고재활용센터에, 홈시어터 시스템은 동생에게 넘겼다) 어렸을 때부터 쓰던 책장에 새로 산 원목 책장 둘을 더해 거실 한쪽 벽면을 서가로 꾸몄으며 컴퓨터를 거실로 내오고 좌탁과 장식장 위에 놓을 책꽂이도 새로 구입하였다. 어지럽던 물건들과 작은방 둘도 말끔히 정리하였더니 새로 이사한 기분인 것이 진을 빼버려 이제 고대하던 이사 일정이 잡힌대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다.

마루야마 겐지에 빠진 와중에 머리를 식히며 읽은 책 중 추천하는 한 권. 강명관의 '是非를 던지다'. 글 솜씨도 좋지만 따뜻한 심성과 시각이 좋아 더 정겹게 읽혔다. 읽는 내내 정민의 글과 비교가 되었다. 본문 중 이익의 붕당론에서 한 대목.

이제 열 사람이 꼭 같이 굶고 있다가 밥 한 그릇을 먹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릇을 다 비우기 전에 싸움이 벌어진다. 물어보니, 말이 불손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불손한 말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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