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일째. 거의 배밀이 없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두 손 두 발로 버티기(엎드려뻗치기)를 여러 날 하더니 곧잘 기어 다닌다. 간밤엔 다들 잠든 사이 혼자 아빠,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제 형과 내가 자는 방을 향해 거실 절반을 가로질러 오기도 하였다(각방자리 육 개월이 넘으니 겪는 재미인지도). 새 책장과 좌탁 구입 기념 겸.
모든 게 아련하기만 하다. 이 여름은 누굴 닮아 지치는 기색도 없이 겨울처럼 아득하고, 어떤 그리움을 핑계로 또다시 퍼마신 날, 산도 들도 바람도 퍼렇게 멍이 들었었다. 다음은 정근표의 구멍가게 중에서 한 대목.
식이 아재는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렇게 돈을 맡겨놓고 뒤뚱뒤뚱 가게를 걸어 나갔다. 그런 식이 아재의 뒷모습에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을 밝히는 작은 빛을 보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끙끙거리는 아이처럼 한동안 식이 아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이 세상에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목다운 거목이 갔다. 이로써 거인들의 시대는 다 가버린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