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from text 2010/03/07 23:40
올봄은 유난히 비가 잦은 것 같다. 늘 그랬는지도, 늘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만, 비 오는 날마다 술을 먹다가는 새로 겨울눈 보기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삼월 첫 토요일, 오전 내 흐리기만 하던 하늘이 막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할 즈음 사촌 여동생 결혼식에 들렀다(오전에는 갓 입학한 서연이의 하교를 기다려 집으로 데려왔다. 일학년 이반 교실에 앉은 녀석의 가늠할 길 없는 포스를 잠시 지켜볼 수 있었다). 고향집을 지키고 계시는 작은 아버지의 막내딸 결혼식인데, 얼굴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마을 분들도 오시고 몇 년 만에야 가끔 뵙는 일가 어른들도 오셨다. 다른 집 대소사에서도 종종 그렇지만 한번씩 이 같은 일을 치를 때면 가족이란 게 뭔지, 가족사란 게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린 기분에 젖곤 한다.

0124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에는 친구네 안사람이 딸, 아들 대동하여 놀러온다기에 불편할까 하여 다시 집을 나섰다. 우산을 챙기지 않고 서둘러 나선 길에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정처가 없던 차 마침 신호에 걸린 노선버스에 냉큼 올라타고는 얼마 전 서연이와 하치 이야기를 볼 때 예고편을 보았던 밀크나 볼까 하고 시내 극장가로 나갔으나 걸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개봉한 줄 몰랐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상영하고 있어 잘 되었다 하였는데 붐비기도 하고 시간이 잘 맞지 않았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을 3D로 보았을 때의 감흥도 그렇고 3D가 시간대도 좋았으나 혼자 시커먼 안경을 덧쓰고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쑥스러워 두어 시간 남은 2D 표를 끊어두고는 저녁으로 스테프 핫도그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먹었다. 좀 걷고 싶었으나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고 갈피 없는 마음도 제멋대로 서성이어 이놈의 것, 상영관 입구 딱딱한 의자에 꽁꽁 동여매고는 나도 의자처럼 내처 앉아 있었다.

디즈니를 만난 팀 버튼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이도 보았으나, 그래도 팀 버튼은 팀 버튼이었다. 조니 뎁도 어쨌든 조니 뎁이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돌아가는 앨리스를 보는 그의 눈빛, 아주 잠깐 스치는 그 표정이었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도 아닐 게다. 대부분의 그럴듯한 잠언들은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니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도박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는지 아직 이른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걸었던 건 늘 나의 전부였다. 걸 때마다 이겼냐고? 걸 때마다 졌으되 그들은 나의 전부를 가져가지 않았다. 전부를 걸어도 나의 전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의 전부를 알았는가. 글쎄, 어쨌든, 버릇처럼 전부를 거는 버릇은 덕분에 없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나의 일부도 모르고 아무것도 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 오늘은 모처럼 서연이와 바둑 두 판을 두었다. 두 점을 접어주고 있었는데, 맞바둑까지 두 판 모두 만방으로 지고 말았다. 기력이 한참 정체되어 있더니 부쩍 는 표가 났다. 이제 두 점, 석 점 내가 흑돌을 늘어놓을 일만 남았다.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와 서숙의 산문집 따뜻한 뿌리를 읽었다.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들을 볼 때면 전망이네, 과학이네, 자연이네, 뭐네, 이것저것 다 떠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고 평화로워진다. 필경사 바틀비에서는 바틀비의 단 이 한 문장이 오래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율이 첫돌

from photo/D50 2010/02/27 20:12
율보뚱보의 첫돌. 음력 생일은 아직 좀 남았으나 바쁠 삼월이 부담스러워 이월 마지막 토요일로 날을 정했다. 그랜드호텔 뷔페 더 키친에서 식구들끼리 점심. 돌잡이 때 나는 돈을 집는 모습만 보았는데, 제 어미 말로는 망치를 집으려 잠깐 기우뚱하는 몸을 바로잡았더니 곧바로 돈을 집어 들었단다. 전날 과음한 숙취가 가시질 않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제 형과 달리 백일도 그렇고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못 남겨주어 미안하다(돌아와서야 건질 만한 사진은 고사하고 독사진 한 장 찍어주지 못한 걸 알았다).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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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4

from text 2010/02/27 10:10
저 아득한 고어 너머 그를 찾아갔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시가 되지는 않았다. 니은자로 구부러져 너는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고, 나의 지갑엔 교통카드와 복권 세 줄, 그리고 낡은 꿈이 접혀져 있었다. 어쩌면 봄비가 그렇게 들이치는 날이었다. 피곤한 네가 잠시 몸을 뒤척일 때 천지가 놓였다 들렸다. 어째서 이것은 시가 되지 못하는가. 그때, 봄 마중 간 날 저녁으로부터의 긴 꿈. 그래, 너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것을. 채비가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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