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득

from text 2009/10/03 23:07
나에겐 결정권이 없어.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에서. 추석 연휴 전날, 벼르던 이사를 했다. 결혼하고 다섯 번째 집. 일이 되려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을 만큼 일이 맞물려 돌아가 한편 내몰리듯이 일이 진행되었다. 주공에서 미분양 아파트를 매입하여 임대하는 것으로, 첫째가 내년에 갈 초등학교는 거리가 좀 있어 아쉽지만 두 사람 직장이나 둘째를 봐주시는 어머니 댁에서 두루 가까워 좋다. 곱절 가까운 전세금에다 새로운 공간에 맞춰 거실에 소파며 책장을 들이고 낡은 세탁기를 바꾸고 아이 방에 침대와 책걸상, 책장 등을 놓으니 모양은 그럴듯한데 먹고사는 일이 새삼스럽다. 무릇 십만 원을 쓸 때 고민하던 것이 만 원 한 장 쓸 때 고민하게 되면 그것을 쓸 때 누리는 혜택과 즐거움은 물론, 더러 만 원, 십만 원이 생겼을 때 얻는 기쁨 또한 열 배는 될 터, 이제야 벌고 쓰는 재미를 제대로 배우려나 모르겠다만.

이달 말이면 이 별에서 꼬박 마흔 해를 보내게 된다. 빤히 치어다보는 가을, 문득 묻어나는 얼굴이 바람처럼 맵고 흐리다.

지우개

from text 2009/09/18 16:13
지우다 보면 지우는 지우개도 지워지기 마련, 지운 기억도 그렇게 지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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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from photo/D50 2009/09/06 07:49
공이치기가 공이를 때리는 순간, 몹시도 엄숙한 그 무엇이 가슴을 스치면서 긴지는 삶과 죽음의 유사와 일치를 본다. 자신은 항상 저승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다. 그곳을 향해 자진하여 온몸과 온 영혼을 맡기려고 하는 순수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긴지는 경악한다.

이 녀석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현세에 존재하는 데 대한 망설임이 깊구나. 지나친 감수성에 휘둘려 본능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구나.

긴지는 애용하던 무기를 죽은 노인에게 인심 썼다. 만일 하늘의 처벌에 굴복하고 싶지 않거든 그걸로 한 방 먹여주시라. 아니면 저 세상에서도 허무하기만 하거든 그걸로 다시 한번 죽으시라. 총알은 아직 충분하다. 두 사람 분은 충분히 되니까 이번에는 부부가 나란히 목숨을 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지개란 이윽고 없어지는 운명을 가진 것이다. 빛의 띠가 찬연할수록 더 빨리 사라진다는 데 무지개의 참된 가치가 있다. 하늘 높이 걸려 있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보는 이들은 선명한 인상을 받게 된다.

마루야마 겐지의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에서 몇 대목. 꽤나 오랜 시간 힘들게 읽었다. 번역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가, 물론 잘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원문에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충실한 번역이 아니었을까 고쳐 생각하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과 같은 번역자였다. '금각사'와 달리 그 책도 꽤나 재미없게 읽은 기억이 난다. 분량을 절반 정도로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마루야마 겐지는 역시 집요하고 무서운 정신의 소유자란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백주 대낮의 긴지, 마코토, 하나코, 조각룡, 가면, 저승사자, 바다거북, 검은지빠귀, 그리고 울새와 큰유리새, 같으면서 다르고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들을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다. 봄 병풍까지 읽고 놔둔 '달에 울다'는 좀 쉬었다 읽어야 할 듯.

* 김은성의 '내 어머니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까지 대부분 세대가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남자인 나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여자가 여자인 어머니로부터 또는 시어머니로부터 이어내리는 질긴 이야기들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사회나 집단으로부터 마초스러움과 억지, 배타적 욕망들은 잘 배워왔겠지만 말이다. 여성성의 긍정적인 대목들을 마주하다 보면 때로는 그 부정적인 대목들을 깡그리 잊고 그 세계에 살고만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한다. 가련한 일이다.

* 첫 이발 후 동자승 같은 율짱. 뒤통수도 예쁘다. 아비나 형이 갖고 있는 제비초리도 없고 그처럼 깎아지른 절벽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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