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from photo/D50 2009/07/10 01:18
사용자 삽입 이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부터 처음 주도를 단련하는 놈처럼 마셔대던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풍만한 유머와 거침없는 품격, 끊임없이 출현하는 술과 담배, 독립적인 인격들과 그만한 쓸쓸함이 넘치는 매혹적인 세계였다. 작가의 이름이 생판 낯설진 않다 했더니 책꽂이 한쪽 구석에 초기작 거대한 잠(The Big Sleep)이 있었다. 책 뒷날개의 메모를 보고 기억을 더듬으니 93년 12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와 함께 그 옛날 술친구에게 받은 책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이들이 바로 서점에서 그냥 들고 나온 책들인지도 모르겠다. 들어본 적 없는 출판사의 문고판에다 간략한 역자 소개조차 없어 번역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감흥 없이 읽고 그대로 그 소감을 전한 기억이 난다. 젠장, 이놈의 정신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뒤처지고 하잘것없기는 매한가진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유머를 보라.

그는 풀러사(옮긴이에 따르면 유명한 옷솔 회사란다) 직원이 관심을 보일만한 눈썹을 치켜떴다. / 빅터의 바는 너무나 조용해서 문 안에 들어설 때 기온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 분홍빛 머리의 참새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단지 참새만이 쪼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쪼고 있었다. / 염소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는 나를 살짝 쳐다보더니 그보다도 더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그 말고는 미동도 없었다. 더 나은 일을 위해서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모양이었다. / 그는 짧은 빨강 머리에 무너진 허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부인이 희미하고 덧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거의 침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문장들도 즐비하다. 53년 작품이다.

스스로 만든 함정만큼 치명적인 함정은 없다. / 세상의 모든 조용한 바에는 그렇게 슬픈 남자가 한 명씩은 있다. / 그때까지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알았을 겁니다. 대부분이라고 해야겠죠. 여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벌 한 마리가 나무 창문턱을 기어 다니며 피곤한 듯 가냘픈 소리로 윙윙거렸다. 이제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없으며, 자기는 끝장났고, 너무나 많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다시는 벌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 여자가 단지 어린 소녀였던 때도 한 번은 있죠. / 술꾼들은 교육이 안 돼, 친구. 그 사람들은 무너져버렸거든. / 기계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인간은 전화를 사랑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갔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 나를 사랑하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경쟁자가 없다는 거지. / 그렇지만 그때부터는 뭔가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는 강철 같은 정신의 1센티미터가. / 범죄는 질병이 아니에요. 단지 증상이지. /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내가 여자기 때문이고 여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들이

from photo/D50 2009/07/06 04:47
조용필이 부르는 떠나가는 배, 지금도 마로니에는, 달맞이꽃을 소리 높여 듣다 보면 소리 높여 따라 울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며칠, 난데없는 소나기가 반가워 한 시절 그렇게 또 견디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1년에 한 장만 건질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런 주장에 대해 많은 후대의 사진가들은 브레송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다. 1년에 한 장은 어림도 없다."

곽윤섭의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중에서. 그럴 리야, 그렇게 엄밀하고 까다로웠다면 그 이름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이 도시의 동쪽 끄트머리에 이만한 번화가가 있다니 낯설고 여전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제와 오래 사귄 남자 친구(최근 안정된 일자리를 구했다. 소식을 듣고 축하한다고 보낸 문자에 처제는 무엇보다 남자 친구가 이제 당당해질 수 있어 좋다고 답했다. 별스레 가슴 한 편이 아렸다)가 찾아와 모처럼 사진기를 들고 나선 일요일 나들이.

Tag //

여름

from text 2009/06/26 13:22
바쁜 일과를 마친 아들의 손을 잡고 폭염특보가 내려진 거리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오후 여섯 시의 태양은 정면에서 바짝 얼굴을 겨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니 올 여름, 내 너를 상대해 주마. 사랑을 사랑으로 다스려 주마. 사람으로 사람을 잊고 거듭나는 이무기처럼 미끈한 몸뚱이를 날것으로 돌려주마.

나오자마자 사놓고 엊저녁에야 다 읽은 김규항의 예수전. 집요한 신앙고백 앞에 억지스러움을 넘어서는 숙연함을 느끼기도. 묵상에 대해 오래 묵상하였다.
Ta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