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철학자

from text 2010/01/31 00:50
며칠 전 출근길. 아빠, 아빠는 몇 살까지 살고 싶어? 난데없는 물음에, 음, 백 살? 하고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되물었다. 서연이는? 이즈음 어린 철학자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아빠 죽을 때까지.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하고, 그저 겨울 아침 공기가 후끈한 것만 같았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자려고 누워서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엄마 죽으면 서율이는 어떻게 해? 만약에 죽으면 어떡하냐고? 아빠도 죽을 거잖아? 했었다. 부쩍 그쪽으로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오늘은 나더러 이백 살까지 살란다. 저와 나의 나이 차를 꼽아보더니 자기는 백예순여섯까지 살 거라며. 서율이도 봐야 하니 너는 더 오래 살아라 했더니 그예 콧잔등이며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이갑용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와 신현칠의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를 달아서 읽었다. 눈앞이 뿌예지고 가슴이 먹먹해 책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나를 포함하여 주변이 온통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지만, 대개 한 줌의 부와 한 주먹도 안 되는 기득권에 기대 제 존재와 그 기반을 배반하는 가련함과 가상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한 터럭의 안락에 기대 예의와 염치로부터 순정과 열정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외면하고 욕망의 심층에 무릎을 꿇고 마는 것도 시대요, 유행인가. 이제 누가 있어 세계를 마음껏 재구성해 보란다면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떡하니 그려낼 수나 있을까. 다음은 신현칠이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에 관한 책에서 보았다는 시구.

나는 신을 보려고 찾았지만 / 보이지 않았다. /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려고 찾았지만 / 보이지 않았다. / 나는 고통하는 형제들을 만나서 / 신도 그리스도도 형제도 보았다. / 그리고 우리들은 함께 / 걸어가기 시작했다.

* 처음 사진집을 샀다. 재출간된 전몽각의 윤미네 집. 따뜻한 시선이 잔뜩 묻어나는 사진만큼이나 잔잔한 기품이 배어나는 글도 좋았다.

* 일요일 오후, 서연이와 함께 꼬마 니콜라를 보았다. 오랜만의 프랑스 영화, 제대로 킹왕짱이었다. 서연이도 벼랑 위의 포뇨 이후 가장 유쾌하게 본 듯.

가감단연

from text 2010/01/11 20:53
지난 주말 오랜 이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지난해 이월부터였으니 꼬박 열한 달 만이다. 젠장맞을 이천구 년도 그예 저물었다.

심신이 많이 약해진 듯, 한번 시작한 미열은 오래 지속되고 약해진 심장은 작은 일에도 무턱대고 뛰고 본다. 나비처럼 팔랑대던 청춘들은 노란 불빛 앞으로 몰려가 저 먼저 부서졌다. 흔들리던 길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고 불빛은 빛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무려나, 진보의 가치나 조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더는 믿지 않든 어쨌든 우선 좀 더 정직하고 볼 일이다. 끊을 건 끊고 이을 건 이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곤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여야겠지. 그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마치 처음 의지를 시험하는 놈처럼.

*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숙취와 함께 어제 그제 죽음(과 가족)에 대한 담담한 정경과 드문 성찰을 보여주었다. 사랑 혹은 열병에 대한 아주 적절한 정의도 있었다. 둘로 이루어진 종교.

두 발짝

from photo/D50 2010/01/02 22:51
새해 첫날, 낮잠 자는 사이 0124님이 찍은 314일째 되던 날의 율짱. 바로 다음 놀다 넘어져 오른쪽 눈가가 찢어지는 바람에 벌써부터 큼지막한 생채기 하나 달았다. 녀석, 며칠 전부터는 서투나마 도리질을 시작하였으며 오늘은 제 스스로 처음 두 발짝을 떼기도 하였다.

* 주경철의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는 얼핏 예상한 방식의 글쓰기는 아니었으나 꽤 좋았다. 이솝 우화집과 아가멤논으로부터 데카메론, 주신구라, 보물섬 등을 거쳐 파리대왕과 허삼관 매혈기에 이르기까지, 마치 그 책들을 다 읽은 것처럼 인간사와 세상사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연대기로써의 역사가 아닌 풍속과 문화, 특히 잔혹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보는 것은 때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무슨 일에서나 살아가는 지혜를 얻기에 앞서 두려움을 먼저 배우는 못난 심성 탓일 게다. 이전투구의 역사, 미련 많은 놈이 결국 인간을 믿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할 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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