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7일, 서연이의 유치원 졸업식. 흔한 의사, 선생님들 가운데 피아니스트는 돋보였고 나름 흐뭇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기실 녀석의 장래 희망은 프로 바둑 기사이다. 아주 잠깐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때가 있었나 보다. 당연한 얘기지만, 생업이 무엇이든 그 생업이 무엇이냐 보다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할 테다.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아비에게는 부끄러움만 넘친다마는, 나누고 도우며 일생을 제대로 누리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매듭 하나 짓는 날, 아비 혼자 와 혹여 섭섭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휩쓸어 가는 물결이 어지럽게 엇갈리면서 큰 돛대 위에 마지막 가라앉아 가는 인디언의 머리 위를 덮었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다만 곧게 서 있는 둥근 목재 몇 인치와 또 거의 같은 높이로 아슬아슬하게 밀려온 무서운 파도에 박자를 맞추며 얄궂게 나부끼던 기다란 깃발뿐이었다. 그 순간, 붉은 빛 팔과 뒤로 들어 올린 망치가 공중으로 밀려 올라오면서 그 깃발을 서서히 가라앉으려는 그 둥근 목재에 더욱 단단히 못 박아 놓으려 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매가 별 사이의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려와 큰 돛대 꼭대기로 다가오더니 비웃듯이 깃발을 부리로 쪼아 보기도 하며 태쉬테고를 방해하고 있었는데, 그 새가 어쩌다가 그 커다란 날개를 망치와 목재 사이에 끼워 넣자, 금세 물속의 야만인이 죽음의 숨결을 헐떡이며 그 망치를 거기에 내려치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늘 위의 새는 대천사 같은 소리를 지르며 왕자다운 부리를 하늘로 쳐들고, 그 사로잡힌 몸은 에이허브의 깃발에 싸여 그의 배의 길동무가 되어 가라앉아 갔다. 이때 작은 해조의 무리가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 위를 소리 높이 울어 대며 날고 있었다. 깊고 깊은 물가의 험한 측면에서는 슬픈 듯 흰 파도가 굽이쳐 부딪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무너졌고, 바다의 커다란 수의는 5천 년 전에 굽이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굽이치고 있었다.
허먼 멜빌의 백경(현영민 옮김, 신원문화사) 1장 어렴풋이 보이다의 첫 문단과 135장 추적, 제3일의 결말 마지막 문단. 장엄한 세계, 그 허망한 종말이 수많은 잠언들 속에 끊임없이 명멸한다. 불멸에 대한 필멸하는 욕망들의 처연한 서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