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에 해당되는 글 7건

  1. 지렁이 소고 2008/12/27
  2. 진눈깨비 2008/12/21
  3. 부활 2008/12/20
  4. 폭풍 2008/12/17
  5. 첫눈 온 날 아침 2008/12/07
  6.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2008/12/05
  7. 꿈인들 곱게 2008/12/04

지렁이 소고

from text 2008/12/27 09:09
춘하추동, 잎 피고 꽃 지는 내력
더는 들어 알 것 없다마는
더러 숨죽여 우는 것은
방금 왔다 금방 가는 까닭이다
따로 또 떨어진 몸이
부럽기도 한 것이다
꽃 분분, 눈 분분
이렇게 흐리기도 한 날이면
오가는 내력 문득
궁금하기도 한 것은
서정에 물든 나도, 어느새 저렇게
갔다가는 오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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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from text 2008/12/21 09:19
만 권 책을 읽고 물을 건너 찾아다니면 무엇 하나. 제 어리석음 하나 깨치질 못하고 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더니, 사는 이치 다 아는 듯 점잔 빼고 앉았구나. 어리석어라, 사람아. 돌아갈 일 코앞이고 돌아올 날 기약 없다.

부활

from text 2008/12/20 00:37
톨스토이의 부활. 먹을 술 다 먹고, 공상할 것 다 하고, 아이에게 치이며, 습관대로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 보니 첫 장을 넘기고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한참 걸렸다. 나중에는 네흘류도프와 떨어지기 싫어 일부러 그러나 싶을 만큼. 죽음의 한 연구 이후, 모처럼 화두를 붙들 듯 즐거움과 괴로움을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다. 딴에는 쫓기듯 읽은 게 그렇다. 어찌 진작 읽지 못했을꼬. 만나고 보면, 다 때가 되어 만난 것이겠지만. (때가 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난 줄을 모르니, 헤어져도 헤어진 줄 모르기도 하는가.)

100년도 더 된 책에 최근의 그럴듯한 담론을 뛰어넘는 전언들이 가득하였다. 사소한 비유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며, 어느 때고 냉정을 잃지 않고, 특히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흐트러짐 없는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읽다 보면 그때의 러시아로부터 한 치도 나을 것 없는 세상과 인민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거장의 웅혼한 세계와 숨결도, 거인의 꼿꼿한 자태도. 오래전 읽어 조심스럽긴 하나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한두 갑절은 윗길인 듯.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의 갑작스런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은 떨떠름하였다. 책장을 덮으며, 옮길만한 대목을 표시하려 붙여놓은 포스트잇(책을 읽으며 이런 걸 붙여보긴 처음이다) 몇 장은 그냥 떼어냈다. 이래저래 부질없는 짓이 아닐 수 없으므로.

* 쪼그라든 심장만 달랑, 허공에 매어달린 느낌을 아는가. 기다리던 신형철의 책이 나왔다. 몰락의 에티카. 함께 주문한 책은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과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바로 전에 사다놓은 박이문의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서점에 가서 살폈으면 이 책을 샀을까. 대체로 글은 좋고 일종의 정보도 얻었으나, 터무니없는 책값까지, 어이없었다),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 그리고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까지, 읽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 어쨌든 세상과 막막한 관계, 거리에 대한 위안거리는 장만한 것. 가보는 거다.

폭풍

from text 2008/12/17 21:26
연이틀 폭풍이 몰아쳤다. 난데없는 계시처럼 두드려 맞았다. 가슴 아랜 천길 낭떠러진데 짓누르는 힘은 천근이 넘었다. 막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마음이 이럴까. 그렇게 짓밟힌 마음이 이럴까. 나무도 새도 꽃도 세상도 미동도 않는데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하려니 외롭고 괴로웠다. 點心으로 월배까지 가 메기매운탕 한 그릇 먹고 나서야, 뜨거운 국물에 보드라운 속살을 뜯어먹고 나서야, 희멀겋고 넓적한 머리통, 그 길게 벌어진 주둥일 마주하고 나서야, 겨우 숙취를 즐기듯 여진을 즐길 수 있었다. 그제야 폭풍이요 계시인 줄 알았다. 매뉴얼 없이 해체 후 재조립한 것 마냥 여기저기 덜거덕거리긴 하지만 그예 형태는 갖추었다. 그나저나 그저 흘러가게 두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 그물에도 걸리는 바람처럼 여태 갈 곳 모르겠다. 아무려나, 짙은 피를 줄 터이니, 알았으니, 그만 튼튼한 심장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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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온 날 아침

from photo/D50 2008/12/07 06:44
첫눈 온 날, 그저께 아침, 전혀 생각 못하고 있다가 쏟아지는 눈발에 일없이 설레고 반가웠다. 서연이는 나무마다 꽃이 핀다고 좋아하였다. 저녁에는 올 첫 송년회 자리, 무어 그리 보낼 게 많고 아쉬울 게 있다고, 내친 김에 사차까지 내달렸더니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온다. 누적된 알코올 때문이겠지, 요즘 몸뿐만 아니라 부쩍 정신도 마음도 약해졌다. 다음은 0124님의 전언.

급하게 손톱 끝 봉숭아물을 확인하고
아직도 남은 봉숭아물에 흐뭇해하는

과연 너의 첫사랑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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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우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이병률의 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전문. 이제야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 아직도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이 아름다운 생은 끝이 날까. 누가 얼른 와서 슬쩍 일러 다오. 가기 전, 술 한잔 부어줄 터이니.

* 아침, 마치 응답하듯 세찬 첫눈이 내린다. 괜스레 들뜨는 이 마음만 갖고도 한 세상 넉넉하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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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들 곱게

from text 2008/12/04 16:33
이런저런 일로 0124님과 메신저를 주고받다,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난데없는 말에, 정당하게, 정직하게, 가난하게 살고 싶단 생각 요즘 자주 한다 전했더니, 저는 고요하게, 저항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그래, 꿈인들 곱게, 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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