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

from text 2008/09/28 23:28
일요일 아침, 쌀쌀한 날씨에 뒤늦게 보일러 불을 지피고는 거실 바닥에 혼자 등 기대고 누워 MP3를 들었다. 꽃다지의 '민들레처럼'에서, 쓴물처럼 사랑처럼 넘어오는 걸 울컥하고 삼켰다. 귀에 꽂고 음악을 들을 때면, 이도 적응이 되려나, 감정선이 말할 수 없이 예민해져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 여름 수련회엘 가서 텐트에 누워 친구가 건네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국화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어떤 비릿한 슬픔 같은 걸 느꼈던 기억, 마구 쿵쾅거리던 가슴을 잊을 수 없다. MP3 플레이어 장만을 망설였을 때에는 장사익의 뽕짝 절창을 듣고 참을 수 없어 술을 이었던 기억도 한몫 했었다. 먹고 싶은, 먹을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들이 생길 것인가. 어제 아침엔 새로 잠을 청하며 김윤아의 앨범 '유리가면'을 듣다 바닥 아래로 꺼져들고 말았다. 차츰 가슴이 뻑뻑하게 조여 오더니 뻐개지듯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차오르는 눈물을 거둘 뿐, 뼛조각이 해체된 듯 꼼짝 못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잠이 들어 오래 헤맸다. 오늘 낮잠에서 깼을 때도 그랬지만, 일어났을 때에는, 한세상 보내버린 듯 먹먹하면서도 지금 바깥에 내리는 가을비처럼 어딘지 맑고 살뜰한 마음이 돌았다.

* 언제 한번, 비 오는 날 차안에서 음악을 들을 때,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무딘 귀를 잠시 틔워주기도 하나 싶다.

* 월요일 퇴근길, 용기(?)를 내어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는 MP3를 들으며 걸었다. 단절의 느낌은 아니군, 몰입도 잘 안 되는데? 풍경을 보는 맛이 섬세한 것도 같고, 길을 건널 때, 그리고 아는 사람을 만날까, 아직까진(!) 자주 두리번거리게 되는구나, 서연이 녀석 다니는 피아노 학원이 이리 가까웠나, 했다.

넣어놓고 두고두고 들을 음악을 고르다가는(기기 등록 이벤트로 마음껏 받아 일정 기간 동안 들을 수 있는 무료 서비스를 받았는데, 들어보고 좋으면 간직하려고 한달 백오십 곡을 구천구백원에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하였다) '추억 여행'을 하는 기분에 빠졌다.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어떤 장면, 어떤 공간이 얽힌 것들에 우선 손이 갔다. 양희은의 '가난한 마음'과 '내 님의 사랑은'을 찾아 들을 땐 아, 하고 금세 스무 살 시절로 날아가기도 했다. 좋은 길동무가 생겼다. 간밤엔 세상이 한번 뒤채는 걸 느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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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깊숙이

from text 2008/09/27 01:20
이제야 가을이 왔나 했더니 겨울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준탱은 가고 술자리 후유증과 아쉬움만 남았다. 예정된 한두 자리만 지나면 확실히 좀 줄여야겠다. 잠시 끊는 것도 좋고.

난생 처음 MP3 플레이어를 샀다. 작고 예쁜 모양에 끌린, 삼성에서 새로 나온 YP-U4.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만 봐도 그것보단 그 공기와 주변을 관찰하고 즐기는 게 낫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길을 걸을 때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자신을 차단하고 고립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면서도 며칠 뭔가 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 저지르고 만 것이다. 누구는 그러더라. 같은 풍경이 듣는 또는 들은 음악에 따라 달리 보인다고. 음악이 아니라도 어찌 같을 수야 있으랴, 하면서도 자동차처럼 그게 또 그렇구나 했다.

큰 건 하나 지를 예정인 건, 아파트다. 역시 세내는 것이지만 지금보다 많이 비싼데다 넓이도 많이 준다. 봐둔 아파트, 봐둔 평수가 결정을 미루는 동안 나가버려 아직 구한 건 아니지만 들어가면 식구들 모두 처음 살아보는 것이다. 지금 사는 곳 계약 기간이 일년여 남았으나 0124님 흔들리는 마음에 넘어가버렸다. 계획대로라면 다음달 말이나 다다음달 초엔 옮길 모양이다(그때쯤 입주 예정인 아파트, 부동산 말로는 다음달 초 입주 점검을 하고 나면 물량이 꽤 나올 거란다). MP3도, 이사도, 결정하고 나니 어딘가 허전하고 복잡하던 마음도 조금은 달래지고 나를 둘러싼 새 환경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품게 된다(음악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알 수 없다. 그만큼 기대도 되는 것이지만, 얼마나 가까이 할런지도 모르고. 다만, TV를 없애고 잡다한 짐들도 정리하고 잡생각도 좀 떨치고 무엇보다 깔끔하고 정리된 공간에 대한 기대는 하게 된다). 그러나 체제 깊숙이 편입하는 이 씁쓸한 기분이란. 언제든 탁 놓아버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건데, 어딘가 저당 잡히고 목매다는 이 꼼짝없는 마음이란.

내가 너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더는 너에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꽃은 지고 마는 것, 더는 거꾸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곳에 포개져, 먼 훗날, 깊이 잠들 수 있기를.

* 서연이가 바둑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었다. 유치원 종일반은 관두고 하원에 맞춰 동성초등학교(내가 입학했던 초등학교이다) 근처의 바둑 학원으로 갔다가 피아노 학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가족들이랑 부대끼고 자연을 호흡하며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안쓰럽다. 좋아하니 시킨다는 핑계로 어른들 욕심만 차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이 녀석이 제 엄마와 함께 프뢰벨영재창의성센터라는 데서 한국웩슬러유아지능검사라는 걸 하고 왔다. 아마도 좌뇌, 우뇌와 관계있을 성 싶은 언어성 소검사(상식, 이해, 산수, 어휘, 공통성)와 동작성 소검사(모양 맞추기, 도형, 토막 짜기, 미로, 빠진 곳 찾기)로 이루어진 건데, 각각의 점수로 언어성 지능과 동작성 지능을 산출하고 합으로 전체 지능을 산출한다고 한다. 결과를 보니 언어성 지능은 상위 0.4%, 동작성 지능은 21.2%, 전체 지능지수는 2%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언어성이 워낙 높아 비교적 평균치에 가까운 동작성을 합하여도 2% 이내에 든다는 것인데, 편차가 커 검사자의 우려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제 엄마가 바둑 학원엘 보낸 것인데, 잘 나가는 쪽 밀어주잔 건지 균형을 잡아보잔 건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바둑 용어를 구사하며 곧잘 덤비는데, 맨 처음 선생님께 들었다는 '이겼다고 좋아하지 말고 졌다고 속상해 하지 마라'는 거라도 잘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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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서

from text 2008/09/10 14:42
아니 누(gnu) 한마리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가도 맹수의 배 밑에 깔리고 나서는 먼산을 보듯 순박하고 담담한 눈망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 화면이라 해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격렬히 몸부림치는 게 아닌, 그 어떤 한없는 순종이 나는 감동적이었다.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에서. 그 눈망울을 본 것 같지 않은가.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지 않는가. 그 눈망울이 빤히 바라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한참 무연히 그 눈망울을 마주보다 '한번 가보는 것이다'에 가슴 일렁였던 원규형의 시 '먼 길'이 떠올랐다. '득병유시 치병유시'에 달아두려다 새로 올린다.

돌담 위의 굴뚝새야
앞 도랑의 버들치야

강 건너
산 넘어 간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그곳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이다

저승길이 대문 밖이니
인연이 다했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
저 세상에
더 많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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