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from text 2008/07/31 23:31
엊저녁, 0124님은 여전히 교육으로 늦는데다, 비도 오고 마음도 그렇고, 서연이랑 둘이 간단히 저녁 챙겨먹고는 집 근처 자주 가는 일본식 꼬치 전문점으로 가볍게 나들이하였다. 단둘이 술집에 간 건 처음이다. 상 아래로 다리를 넣을 수 있는, 늘 앉는 자리에 마주 앉았더니, 언제나 정겨운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께서 몇 분 더 오시는지 묻는다. 답니다 했더니, 조금 놀라는 눈빛으로, 혼자 오셨어요? 하는데, 이 녀석이 대뜸, 저도 있어요 소리치는 바람에 주변 손님들의 이목을 끌고 여럿 웃음을 자아냈다. 유쾌한 술자리가 되리란 예감을 하며 같이 안주를 고르고 소주 한 병 주문하여, 서로의 잔에 저는 술을 따르고 나는 물을 부어 심심찮게 건배하며 대작하였다.

흔히 갖는 술자리와 달리 진지한 대화부터 시작하였다. 아빠는 서연이한테 바라는 게 하나 있다, 밥을 먹을 때나 이렇게 식당에 앉아있을 때 가만히 앉아서 먹었으면 좋겠다 했더니, 짐짓 심각한 얼굴로 알았단다, 그렇게 하겠단다. 서연이도 아빠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 했더니, 담배는 피우지 말고 술은 조금만 마셨으면 좋겠단다. 잠시 실랑이하다 담배는 줄이고 술은 덜 먹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고는 묵찌빠, 가위바위보, (제멋대로)가위바위보 하나 빼기, 중간말잇기, 끝말잇기를 거쳐 녀석의 미래에 대해 잠시 들을 수 있었다.

뜬금없이 이천이십일년에는 서연이 몇 살이에요? 그럼 이천삼십삼년에는요? 이천사십이년에는요? 등등 묻고는, 답해주는 나이에 따라 고등학교 삼학년이네, 어른이네, 아빠 나이랑 똑같네, 어쩌네 하더니,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원별애랑 결혼한단다. 저희들끼리는 결혼을 약속한 이현지라는 단짝이 있는 줄 아는 터라, 현지는? 했더니, 이현지는 나중에 저를 안 좋아할 지도 모르는데, 원별애는 나중에도 저를 좋아할 거란다. 그래서 원별애랑 결혼할 거란다. 아빠 나이랑 똑같네 할 때에는, 서연이도 그때 아빠한테 서연이가 있는 것처럼 아기 있겠네 했더니, 원별애가 낳으면요? 하고는 실실 웃는다.

다음날 오마시던 빙부께서 들르셔서, 술과 안주를 삼분의 일 가량 남기고, 아쉬움을 두고,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선선했다. 열대야 탓도 있겠지만 한동안 또 잠을 설치고 새벽에 깨는 일이 잦더니 모처럼 깊이 잤다. 가게에서 나와 손을 잡고 걸을 때는 뭔가 꽉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녀석과 대작하는 동안 받은 교감과 유대의 느낌을 되새기며, 나누는 자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간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자유에 집착하여 그 소실을 그리 염려하고 언짢아하였던가 돌아볼 수 있었다.

* 말하는 김에, 오늘 아침 녀석과의 출근길에서의 대화.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오늘은 누가 데리러 올 거예요? 묻는다. 아빠가 데리러 갈 거라 했더니, 일 있으면요? 하고 되묻는다. 오늘은 일 없으니 아빠가 데리러 갈게 해도, 갑자기 일 생기면요? 그럼 어떡해요? 집요하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할머니 댁에 가 있으면 되지 했더니, 그러니까요, 지금 슈퍼 가요, 헤헤 웃으며 손을 잡아끈다. 과자든 사탕이든 빙과류든 딱 하나만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정해놓고 사주는데, 혹여 하는 생각에 저녁까지 못 기다린단 심산 거다.

하나 더. 조금 전, 제 어미가 왔을 때 둘의 대화. 방학이라 유치원 도시락 반찬으로 고민인 어미가, 장 봐서 월요일엔 김밥 싸줄까? 하는 말에, 그럼 김하고 밥하고 재료하고 싸주세요, 서연이가 싸서 먹을게요, 천연스레 대꾸한다. 제 어미 음식 솜씨를 교묘히 타박하는 건지, 말 비틀기인지, 나도 따라가려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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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from text 2008/07/30 13:31
늘, 앞에서는 그러지 못하지만, 생각해 보면, 온순하신 두 분 앞에 한없이 낮게 엎드리고만 싶었다. 지금껏 주고받은 말씀의 총량이 마음 맞는 친구와 하룻저녁 술자리에서 나눈 그것보다 적은 아버지, 꼿꼿하고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니. 나이를 먹어가며, 두 분의 성정이 내 바탕에 실핏줄처럼 스며 있는 걸 느끼는 때가 는다. 무던히도 세상에 거역하고 거부하며 나대로 작은 탑을 쌓아왔지만 다 내 것이 아니었다.

옆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적정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걸 수시로 느껴야 한다는 것은 힘들고, 오래 못 견딜 일이다. 세세한 신경을, 많은 걸 가족을 위해 쓰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한 순간 경멸의 눈초리, 팽개쳐진 삶의 조각들이 한동안 그 자리를 대신하여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다 까마득히 날아온 소식이었다.

나를 봐도, 우리를 봐도 자신 없었다. 내 얘길 들으니 저도 자신 없다며, 그러나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했을 때, 나는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만들어놓고 싶었다. 언제 어느 때든 예비해 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간데없는 마음 하염없이 들여다보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번지는 작은 손짓의 흔들림을 느꼈다. 아, 어쩌란 말이냐.

나한테, 참, 무거운 녀석이다. 병원을 찾은 날까지 아무런 떨림 없이 짓누르기만 하더니, 쿵쾅대는 심장소리로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천천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대꾸하지 않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내 귀와 입을 열게 하였다. 무릇 감당하지 못할 일이 있을라고, 여전히 녀석은 나에게 무겁지만, 그러안지 않을 수 없는 딱 그만큼의 무게를 나에게도 주었다. 먼 훗날, 내가 저의 이름을 부를 때, 함께 불릴 이름에 고이 머리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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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from text 2008/07/29 04:54
저도 내 맘 같을까, 행여
저가 내 맘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