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

from text 2009/03/29 23:41
어제 예정에 없던 사랑니를 뽑았다. 오른쪽 아랫잇몸 수술 도중 앞쪽 어금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라며 뽑은 것인데, 지금껏 그로 인한 어떤 증상도 없었던 데다 잇몸 아래 숨겨져 있어 나로서는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일한)사랑니여서였을까. 그간 존재조차 몰라서였을까. 처방전을 들고 치과를 나와 약국으로 가는 동안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매주 한 시간 안팎을 의사나 간호사 앞에 입을 딱 벌리고 누워 좋지 않은 속을 드러내고 있다 보면 일종의 자기 모멸감 내지는 자기 연민에 젖어들곤 하는데, 이날은 특별히 더 뭔가 위안이 필요한 기분이었다.

중앙통 거리는 발랄하고 흥겨웠다. 새치름한 날씨에 제 모양을 잃고 우중충히 돌아앉은 봄꽃들과 달리 거리의 여인들은 날씨 따위 아랑곳없이 통통 튀었다. 위안거리 삼아 뭐라도 지를 품새로 가까운 백화점엘 들러 에스컬레이터로 맨 위층까지 올랐다가는 그냥 내려왔다. 그리고는 술 먹은 다음날이면 자주 사먹곤 하던(술을 먹지 않고부터는 생각나지도 않던)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거즈를 앙다문 입으로 점원과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햄버거와 샐러드를 포장해 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돌아다니다 온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며 진료 시작 후 신경치료 이래 가장 큰 통증과 연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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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명

from text 2009/03/18 20:16
사십여 일 술도 담배도 멀리 하였다. 반가운 얼굴들, 어쩔 수 없는 자리, 돌아온 봄을 핑계로 서너 차례 많고 적게 마시고 피웠으나, 열흘 가량은 참말 딱 잊고 지냈다. 욕망이 거세된 듯 거짓말처럼 조금도 생각나지 않고 주변의 유혹도 방해도 없었다. 매주 꼬박꼬박 기약 없이 이어지는 치과 진료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사는 모양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 것이다.

어제오늘 집 앞 도로변에 피기 시작한 벚꽃이며 오며가며 남의 집에 핀 소담한 목련을 보고도 무심키만 하더니, 한낮 봄바람에 실려 멀리 그늘진 옹벽에 샛노랗게 핀 개나리 한 무리를 보고는 꽃을 두고도 한잔 술을 떠올리지 못하는 생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였다. 부질없는 고집과 날리는 꽃잎보다 가벼운 사람살이며, 오가는 계절과 가고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였다. 무릇 진통 없는 생산이야 없을 터, 비로소 너와 나는 이렇게 근접하는 것인가, 슬픈 밀명에 울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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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리오

from text 2009/03/16 00:11
사라지는 해를 잡으려 부러진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봄이 오다만 길목, 지워진 메아리가 울고 있었다. 절정의 순간을 미루거나 지나친 흔적들이 거기, 살고 있었다. 어차피 눈 한번 돌리는 대로 재구성되는 세상이었거니, 한 꺼풀 벗겨낸 자리엔 색색이 셀로판지 모양 예쁜 꽃이 피었다. 후미진 술집 낡은 모니터에선, 후욱, 썩은 입김을 타고 멜빵바지, 화면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용히 구겨져 나발이나 불고 더 낮게 욕이라도 웅얼거릴 때가 좋았지, 상마다 곱게 얹힌 검은 머릴 신나게 퉁겨 오르고 있었다. 봄이 돌아간 길목, 그렇게 버려진 꿈들이 버섯보다 거대하게 부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