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장마

from text 2008/06/27 00:25
누구나 제 몫이 있다더니, 마감 전에는 알 수 있는 건가. 마른장마 지나는 동안, 나 스스로 나와 세상의 어떤 가능성을 닫은 느낌,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을 천천히 내딛는 느낌이다. 이미 강제된 느낌. 세상은 그러나 또 그때, 그에 맞는 얼굴을 보여줄 게다. 제 본성대로 썩은 손짓이라도 하고야말 테니. 그때, 어디로 갈지는 역시 그때밖에는 모르는 것이지만. 세상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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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땐

from text 2008/06/25 14:49
조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겠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겠다. 말하자면 역사가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다 하여 접시 물에 코를 빠뜨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것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 충분히 악의적인 것이다. 해서 말인데, 술과 안주 앞에 맹세를 놓듯이, 두 손 두 발 놓고,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잔 거다. 물론 사태의 결말을 책임질 순 없다. 다만 그땐 손짓이 보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세상이든 누구든, 저도 돌아앉게 마련이니.

* 별처럼 찾아온 거다. 고운 꽃처럼 다가온 거다. 부여안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안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거다. 그게 명령이다. 그때 명령의 정체다. 손짓마저 외면할 수는 없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 조금 전, 노태맹의 '푸른 염소를 부르다',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슬라보예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이 왔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를 보고 마음 동해 주문한 책들. 거기 여러 잠언들이 있었지만, 하나만. 고통은 무례를 용서하게 만드는 법이다.

다음은 태맹이형의 시집 뒤에 실린 인상적인 '시인의 산문' 중 한 구절.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오래, 가장 강렬하게 사랑한 이 것. 조사 하나를 들고 밤새 문장 한 구석에 꿰어 맞추기하던 날들. 입 안에 얼음이 씹힌다. 고맙다, 덕분에 많이 고통스러웠다. 젠장.

그리고 시 한 편.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5월이 다 지나도록
아파트 화단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져야 할 것이 지지 않으니
끔찍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강박장애다.

난 중력에 병들어 있는 거다.
동네 돼지 수육집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이제 아무에게도 나를 이해시키지도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革命이
붉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든
동백꽃처럼 그 자리에서 지지 않든
그건 동백이 가고 그 동백을 만나러 오는
봄바람의 몫이다. 모가지를 꺾고
붉게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봄바람의 동백꽃들 몫이다.

막걸리잔에 앞머리 적시며 졸다가
나 문득 한 소식 본다. 사랑이란
그 사랑을 타인으로 놓아주는 것
지지 않는 동백꽃을
그저 붉은 동백꽃으로 바라다보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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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from text 2008/06/18 16:21
허공에 대고서라도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도
떨리는 손, 시커먼 얼굴을 달래가며 술을 마시는 것도
다리로 다리를 끌며 꾸역꾸역 산을 오르는 것도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도
추억은 추억일 뿐
거리를 헤매며 못내 지난 기억의 갈피를 뒤지는 것도
날이 밝고서야 잠이 드는 것도
다 저를 위한 것이다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맹세만큼 부질없는 것이 있을까
생을 지나다 마주친 그 사람
비슷한 부류일지라도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고 되뇐들
빗속에 땀 흘려 애써 고단한 몸을 만든들
낯선 가슴, 먼 얼굴로 내일 일일랑은 내일 만난들
긴 장마에 땅이 하늘로 일어나든, 하늘이 땅으로 내려앉든
각자는 각자일 뿐, 시간의 더께에 손끝 하나 덧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렴, 엄살 부려본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말고

* 어제, 서연이가 아파 유치원 마치고는 피아노학원도 쉬고 같이 동네 의원에 들렀다 집으로 갔다. 저녁 먹고 잠시 놀다 피곤하여 혼자 먼저 누웠더니 슬그머니 들어와 옆에 누우며 속삭이는 말이 예뻤다. 새로 가슴이 뛰는 듯 벅찼다. 그 청유형의 은근한 억양과 뉘앙스를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아빠, 사랑해. 내일 아침에도 같이 손잡고, 유치원에 가자. 일찍 일어나서 밥 먹고 약 먹고. 아빠, 사랑해. 내일도 같이 유치원에 가자. 아빠도, 잘 자. 그러고는 한번도 보채지 않고 잠이 들었다. 0124님은 월요일 야근에다 오늘부터 또 석 달 가량 수요일과 목요일, 밤늦게까지 교육이다. 긴 하루가 늘었다. 아직 여름은 오지도 않은 듯 하더니 밤새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순간 무너질지라도 쌓을 땐 열심히 쌓을 수밖에 없을 터, 어쨌든 당분간 근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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