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from text 2008/05/22 14:02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명을 내뿜는 나무를 대할 때, 숨쉬는 대지를 만끽할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작고 슬픈지, 물기 차오르는 일인지, 거리에서 식구를 마주쳤을 때, 제 몫을 감당하고 있는, 여물어가는 아이를 볼 때, 내 어깨와 눈빛에 기댄 어린 짐승을 생각할 때, 한 순간, 세상은 얼마나 까마득한지, 돌아서던 자리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을 때, 다정한 눈빛을 교환할 때, 기어코 다가서는 마음을 묵묵히 억누를 때, 하늘이 감응할 때, 떠나간 사람을 곱게 떠나보낼 때, 살아있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세상이 얼마나 새파란 거짓말인지, 멀리 멀리 돌아 한 몸뚱이 누일 때,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 것인지, 서럽도록 아름다운 것인지.

M6 스물세 번째 롤

from photo/M6 2008/05/18 23:43
얼마 전, 포항 간 첫날, 죽도시장 안 횟집에서 점심 겸 소주 한 잔 하면서 그저 건배하기 맨송맨송하여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하고 셋이서 잔을 부딪친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서연이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술을 따르는 것은 온전히 이 녀석의 몫이며, 건배할 때 행여 빼놓았다간 심술기에 한참 술맛이 달아나기 일쑤다. 물 잔이나 음료수 잔으로 꼭꼭 같이 잔을 부딪쳐야 하며, 자주 먼저 잔을 드는 바람에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지기 예사다.

어제 '아지야'에서 청주, 오늘 '예궁'에서 고량주 마시는 자리에서 이 녀석의 건배사가 걸작이었다. "우리, 가족을, 위하는데, 건강하고, 행복은, 창문을 타고 오는데, 바람이 불고, 그런데, 위하여." 아지야에서 첫잔 비울 때 열린 창문을 보며 한 녀석의 건배사이다. 우리가 웃고 즐거워하니까 재미를 붙였는지, 매번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재미난 건배사를 해냈다. '합류하다가', '회항하여' 같은 표현까지 곁들여 길게 이어갈 때는 꽤나 놀라기도 했다. 기억나는 게 많지 않아 아쉽다.

철들려면 멀었다지만, 나이를 그렇게 썩 헛먹지는 않았을 터, 빨리 잊는 법, 쉽게 타협하는 법도 익혀 왔는걸, 시시한 세상이 가까워지면 안타까운 일도 그만큼 줄어들 테지. 성장(盛裝)한 여인처럼 불쑥 다가선 봄은, 그렇게 갈 테고, 시시한 세상도, 이 봄도, 언제 그랬냐 할 테지.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프로이미지100

마흔

from text 2008/05/17 12:49
뭐든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나이, 일부러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이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을 되살려 기어코 소진하고 마는 나이, 어제
과음한 다음 날, 살진 짐승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온통 하얗게 바랜 채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만났다.
문득, 세상이 그렇게 작고 예쁘게 보일 수 없었다.
일상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과
여전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세상은 여전했다. 제 방식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정답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석양이 보고 싶다. 운명을 닮은 석양, 며칠 그것만 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을 꿈꿔 왔나 보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나 보다.
꾸미고 가꾸는 만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 채
편리와 일상을 버린 채
불가능을 두드렸나 보다.
철이 들면 단순해진다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놓질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