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from text 2008/01/15 19:44
어제, 많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고 들어왔는데 아들 녀석이 열두시가 다 되도록 자지 않고 칭얼대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길 해 주마 하고는 겨우 옆에 눕힐 수 있었다. 토닥토닥 그 단단한 가슴을 두드리며 이야길 시작하는데, 그때서야 취기가 오르는 듯 나도 잠이 드는 듯 서로가 서로에게 잠겨들었다. 머리 한쪽에서는 어떤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정조가 저 혼자 떠다니기도 했다. 어째서 꽃 이야길 하게 되었을까.

봄에 피는 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단다. 그래서 화사해 보이지.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는데 그 간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진달래, 개나리, 벚꽃, 목련, 모두. 여름에 피는 꽃은 잎이 무성한 가운데 피니까 더 화려할거야. 장미도 백합도 해바라기도. 우선 꽃이 보여야 하거든. 가을에 피는 꽃? 수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지. 왜 그런지는 몰라. 다들 지는데 피어날려니 그러나? 겨울에 피는 꽃은, 동백이나 매화나, 떨어지면서 더 아프거나 향기만 오래 남는 꽃들이야. 그렇게 흔적을 남기는 거지, 왔다 가는 흔적을.

속씨식물들이 자신의 생식기관을 이렇게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피워 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이제야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목이 말라 부엌에 들어갔다가 겨울이 오고부터 부엌 가장자리에 들여놓은 여러 화분들 중 납작한 난 화분 하나가 꽃대를 대여섯 개나 밀어올린 걸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작은 봉오리에서 하얀 꽃이 활짝 필거라고, 대여섯 밤도 지나지 않아 향기가 가득할거라고 아들 녀석에게 일렀던 것도 생각난다. 밤새 꽃들에게 위안이라도 받은 듯, 아침 대기는 잠시 상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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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5

from text 2008/01/07 20:06
물빛에 비친 행성은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가 다른 세상을 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다. 작은 행성은 돌기를 멈추었고 세상은 잠시 정지하고야 말았다. 이윽고 누군가 낮게 토하던 한숨을 남자는 들었을까. 지키던 별들은 제집으로 갈 시간을 지켰으며, 물빛 속에 노랗게 빛나던 달은 다시 하얗게 바랬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돌에 새긴 믿음이나 약속도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법, 애초에 바람에 새겼던들, 가볍게 새겼던들. 남자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여자는 눈물 대신 붉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기 위해 한사코 웅크리던 때가 있었지. 세상을 흘끔거리던 그때, 산처럼 나를 누르던 것은 나였어. 해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 남은 황금처럼 빛났지만, 눈이 멀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작은 행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있으며 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나 있을까. 마음에 기대 몸서리치는 마음이 갈 자리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남자는 마른 손을 들어 허공에 놓았다. 딱 죽을 것만 같던 마음도 작은 흔적으로 갈무리된다지요, 산다는 일은 그 흔적을 후벼 파고서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것은 낯익은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제야 오랜 되새김을 마칠 때가 온 것일 뿐, 오랜 되새김이 비로소 시작된 것일 뿐. 죽은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이 행성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나무의 전언

from text 2008/01/02 18:58
당신이 누구든, 행복하시라, 언제 어디서든. 담배 한 대 태우다가, 언제 거기 있었나, 각자의 거리를 유지하고 칼바람 속에 꿋꿋이 저 혼자 저를 다 감당하고 있는 나무 무리를 보았다. 저 혼자 탄 담배가 필터만 남았을 즈음, 단 한마디 말을 들었다. 버리라 한 것도 같고 벼리라 한 것도 같다. 마음을 이기려 모진 걸 찬 바람에 새기면서도 청춘이라 하였건만, 미혹하는 마음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했는데, 사나흘 몰아치던 것들이 정점에서 일순 잦아들었다. 처음 마음이 곱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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