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from text 2008/06/18 16:21
허공에 대고서라도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도
떨리는 손, 시커먼 얼굴을 달래가며 술을 마시는 것도
다리로 다리를 끌며 꾸역꾸역 산을 오르는 것도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도
추억은 추억일 뿐
거리를 헤매며 못내 지난 기억의 갈피를 뒤지는 것도
날이 밝고서야 잠이 드는 것도
다 저를 위한 것이다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맹세만큼 부질없는 것이 있을까
생을 지나다 마주친 그 사람
비슷한 부류일지라도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고 되뇐들
빗속에 땀 흘려 애써 고단한 몸을 만든들
낯선 가슴, 먼 얼굴로 내일 일일랑은 내일 만난들
긴 장마에 땅이 하늘로 일어나든, 하늘이 땅으로 내려앉든
각자는 각자일 뿐, 시간의 더께에 손끝 하나 덧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렴, 엄살 부려본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말고

* 어제, 서연이가 아파 유치원 마치고는 피아노학원도 쉬고 같이 동네 의원에 들렀다 집으로 갔다. 저녁 먹고 잠시 놀다 피곤하여 혼자 먼저 누웠더니 슬그머니 들어와 옆에 누우며 속삭이는 말이 예뻤다. 새로 가슴이 뛰는 듯 벅찼다. 그 청유형의 은근한 억양과 뉘앙스를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아빠, 사랑해. 내일 아침에도 같이 손잡고, 유치원에 가자. 일찍 일어나서 밥 먹고 약 먹고. 아빠, 사랑해. 내일도 같이 유치원에 가자. 아빠도, 잘 자. 그러고는 한번도 보채지 않고 잠이 들었다. 0124님은 월요일 야근에다 오늘부터 또 석 달 가량 수요일과 목요일, 밤늦게까지 교육이다. 긴 하루가 늘었다. 아직 여름은 오지도 않은 듯 하더니 밤새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순간 무너질지라도 쌓을 땐 열심히 쌓을 수밖에 없을 터, 어쨌든 당분간 근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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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대신하여

from text 2008/06/09 16:27
생명을 얻어 세상에 나올 때 사람으로 나기 쉽지 않은 일이라고들 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테지요. 인연이 있어 만나고 소식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가슴 저린 일일는지요. 나고는 가고 오고는 가는 게 세상일이라지만, 잠시 머무는 모양이 이리 안타까운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오늘은 지나간 한때처럼 오래오래 당신을 생각합니다.

올해 여름은 사계절을 몇 번이나 겪고도 여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마음처럼, 사나운 봄도 길어진 걸까요. 지난 밤 꿈에는 헤매는 길목마다 화사한 봄꽃들이 피어 새봄이 온 줄 알았습니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나무는 겉으로 드러난 제 키만큼 보이지 않는 사방으로 뿌리를 뻗고 있다고 합니다. 지탱하는 힘이란 이와 같겠지요. 어느 뿌리엔가는 남몰래 꽃도 맺고 열매도 피울 겁니다.

유월, 오늘, 햇살이 곱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여고생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유난히 정겹습니다. 강물은 바다를 잊지 않는다던가요. 저무는 어느 길목에서 언뜻 아지랑이처럼 번지다 사라지는 미소를 본다면, 그때 가여움인가 하소서. 하기야 먼저 돌아누운들 저도 같이 돌아눕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어쩐지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까무룩, 손만 모으고 맙니다. 나고, 살아 곁에 있는 것, 세상을 대신하여, 이만, 합장.

한평생 꿈결같이

from text 2008/06/03 23:55
옛날 세상 같으면 서러운 심회를 필묵에 맡겨 혼쇄(渾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저(江渚)에 낚대로 벗을 삼아 한평생 꿈결같이 살아 나갈 수도 있을 터인데, 현대라는 괴물은 나에게 그렇게 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풀이에 따르면, 혼쇄란 발묵(發墨)으로 흐리게 하고 필선(筆線)으로 선명하게 한다는 뜻. 몇 해 전 사다놓고 읽다만, 열화당에서 2000년 새로 펴낸 김용준의 '새 근원수필'을 들추다가,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출판될 당시 발문에서. 다시 읽으며 왜 그렇게들 추켜올리는지 진미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술병이 과한 겐지, 한 모롱이 돌아가는 겐지, 그저께는 하루 종일 허리가 내려앉듯 아프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한쪽 어깨와 목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팠다. 동물은 동물인지라, 마음 아픈 것 만한 게 없다는 건 순 거짓말인 줄 알겠더라. 옆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조금 나은 듯하긴 한데, 시커먼 얼굴에 부실한 몸뚱아리를 보고 있자니 다 던져두고 어디 큰 그늘 아래에서 바람이나 쐬고 요양이나 하다 왔으면 딱 좋겠다 싶다. 사는 게, 바쁜데 안 바쁜 건지 안 바쁜데 바쁜 건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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