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from text 2008/07/30 13:31
늘, 앞에서는 그러지 못하지만, 생각해 보면, 온순하신 두 분 앞에 한없이 낮게 엎드리고만 싶었다. 지금껏 주고받은 말씀의 총량이 마음 맞는 친구와 하룻저녁 술자리에서 나눈 그것보다 적은 아버지, 꼿꼿하고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어머니. 나이를 먹어가며, 두 분의 성정이 내 바탕에 실핏줄처럼 스며 있는 걸 느끼는 때가 는다. 무던히도 세상에 거역하고 거부하며 나대로 작은 탑을 쌓아왔지만 다 내 것이 아니었다.

옆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적정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걸 수시로 느껴야 한다는 것은 힘들고, 오래 못 견딜 일이다. 세세한 신경을, 많은 걸 가족을 위해 쓰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한 순간 경멸의 눈초리, 팽개쳐진 삶의 조각들이 한동안 그 자리를 대신하여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다 까마득히 날아온 소식이었다.

나를 봐도, 우리를 봐도 자신 없었다. 내 얘길 들으니 저도 자신 없다며, 그러나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했을 때, 나는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만들어놓고 싶었다. 언제 어느 때든 예비해 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간데없는 마음 하염없이 들여다보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번지는 작은 손짓의 흔들림을 느꼈다. 아, 어쩌란 말이냐.

나한테, 참, 무거운 녀석이다. 병원을 찾은 날까지 아무런 떨림 없이 짓누르기만 하더니, 쿵쾅대는 심장소리로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천천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대꾸하지 않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내 귀와 입을 열게 하였다. 무릇 감당하지 못할 일이 있을라고, 여전히 녀석은 나에게 무겁지만, 그러안지 않을 수 없는 딱 그만큼의 무게를 나에게도 주었다. 먼 훗날, 내가 저의 이름을 부를 때, 함께 불릴 이름에 고이 머리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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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from text 2008/07/29 04:54
저도 내 맘 같을까, 행여
저가 내 맘만 할까

우정

from text 2008/07/28 14:26
바빠질 것 같은 예감, 견제하는 심정으로 주문한 책 몇 권이 도착하였다. 김소연의 마음사전, 공선옥의 행복한 만찬,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 김종철의 땅의 옹호, 그리고 녹색평론선집 2. 다음은 땅의 옹호 '책머리에' 중 일부. 오래 전 읽다만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녹색평론> 100호를 기하여 내놓는 이 책의 준비과정에서 나는 <간디의 물레> 이후 내 생각에 일어난 약간의 변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변화는, 간단히 말하면, 근년에 이르러 이반 일리치의 생애와 사상이 내게 갈수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온 점과 크게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일리치는 우리의 삶에서 '우정'이 갖는 중심적인 의의에 대해서 나를 깨우쳐주었고, '우정'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다.
나아가서 일리치는 내게 실제로 좋은 벗들을 불러다주었다. 내가 오랜 직장이었던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로 자리를 옮긴 뒤, 나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벌써 4년이 넘었지만 대부분 초기회원들이 계속해서 참가하고 있는 이 모임을 통해서 나는 대학생활에서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우정'은 사심없는 마음, 자기희생의 정신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고 일리치는 말했다. 그의 말은 실제로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서 빈번히 입증되었다. 나는 이 책이 이 모임의 벗들에게 하나의 작은 선물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책을 내놓는다.


그리고 방금 찾아 읽은 프레시안에 실린 강양구 기자의 김종철 선생 인터뷰 중에서.

- <녹색평론> 외에도 단행본을 내고 있다. 어떤 책이 첫 단행본인가?

<녹색평론 선집 1>을 제외하고는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실질적인 첫 단행본이다. 그리고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두 번째로 펴냈다. 장일순, 권정생 두 분은 일리치, 간디와 더불어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바를 말, 글과 삶을 통해 몸소 실천한 이들이다.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그들의 책을 낸 것은 또 다른 큰 보람이다.

- 마침 권정생의 1주기다. 고인의 생전에 깊은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 스승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대한민국에서 그가 '제일 무서운 양반'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 가지 일화를 말하자면 이런 게 있다. 어느 날 그가 툭하고 이런 얘기를 던지더라. 한창 퇴계 이황이야말로 한국의 유일무이한 대사상가라고 주목하던 때였다. "퇴계 집에 노비가 150명이나 있었다고 합디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노비는 생산에 동원되지 않으니, 그 노비까지 먹여 살리려면 퇴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소작농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이 한 마디로 퇴계 학문의 관념성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를 만나서 얘길 할 때마다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다.


* 잠깐 들른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하나 더, 그건 그렇게 사는 게 '옳기 때문'이 아니라 '편안하기 때문'이다. 쳇, 가히 耳順을 지나 從心의 경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