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경주 1

from photo/D50 2008/08/10 03:02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짧은 휴가. 목요일엔 CGV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님은 먼 곳에'를 보고, 금, 토 이틀은 경주엘 다녀왔다. '놈놈놈'은 칸 버전을 보았는데 기대 이상이었고, '님은 먼 곳에'는 조금 기대 이하였다. 바람 한 번 쐬지 않고 지나면 아쉬울 거라고, 물놀이와 신라밀레니엄파크 구경, 하루씩 일정 잡아 또 만만한(?) 경주를 택했다. 수영장은 어릴 때 딱 두 번 가본 것 말고는 첫 출입이었다. 준비된 두 분과 달리 수영복도 수모도 없이 갔다가 대여가 되지 않아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별로 맘에 들지도 않는 것까지 사서 '뭔가 해내는' 기분으로 들어갔는데, 나쁘진 않았다. 어쩌면 수영복 아까워서라도 종종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키 108센티미터 이상은 절대 혼탕을 허용할 수 없다는 완강함에 밀려 처음으로 서연이와 목욕탕엘 같이 들어갔는데, 아주 좋았다. 아들 가진 세상 아비들이 흔히 같이 목욕하는 즐거움을 거론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물론 상업적 이해에 따라 지어진 것이지만, 옛 문화 재현의 우리식 얕음과 상스러움의 표본을 보는 듯해 마뜩잖았다. 그래도 마상무예와 더운 날씨에도 열성적인 연기자, 친절한 직원들이 인상적이었다.

동대구역, 경주역, 간간이 내리던 비, 택시, 경주교육문화회관, 라면, 김밥, 못난이 수영복, 수모, 야외수영장, 사우나, 거구장, 순두부찌개, 해물된장찌개, 삼겹살 삼인분, 누룽지, 생맥주광장, 노가리구이, 훈제치킨, 엄청난 소낙비, 파라솔, 조식 뷔페, 신라밀레니엄파크, 화랑의 도, 천궤의 비밀, 호낭자의 사랑, 석탈해, SFX 스테이지 쇼, 밀레니엄 매직 쇼, 셔틀버스, 경주역, 대구역, 미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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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0731-0805

from text 2008/08/05 18:08
재미있는 모양이다. 소식도 없이.

이렇게 아쉽고 안타까운 게 많아서야 어디 제대로 하직인들 할 수 있겠느냐.

오랜만에 집을 못 찾아 헤매 다녔다. 여기도 집 앞 네거리 같고 저기도 집 앞 네거리 같더니 집 앞 네거린 낯설기만 하였다. 발음이 꼬여 말도 말 같지 않았다.

일부런 듯 종일 TV를 보는데 문득 42인치 LCD TV가 괴롭히다. 욕 조금, 눈물 조금, 옛 생각 조금 하다 발로 밟아 끄다. 이만한 것에도 이럴진대, 못난 놈, 하다 TV를 끊을 생각을 하다.

이대로 사육, 당해도 좋단 생각, 잠시.

지난겨울 한때처럼, 그 길을 따라 오래 걸었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이 몸의 기억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프거나 다친 자국은 몸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 다 아물어 보이지 않아도, 마음엔 흔적도 없어도, 자칫 깊고 오랜 상처가 반복될까, 저도 모르게 짧고 얕게 지날 길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 담장 너머 보란 듯이 매달린 석류를 보았다. 그리워 그리워 꽃 진 자리에 그리다 그리다 맺힌 암반 덩어리.

인연이 아니면 인연이 아닌 것, 세상도 저도 나도, 길이 다르면, 그렇게 살다 가는 것.

세 번 이상 반복되면 그건 그런 거다. 어쩔 수 없는 거다. 헛먹었을지라도 나이가 가르쳐준 것, 먹은 태는 낼 줄 아는 거다. 시시한 세상, 이라지만 아쉽고 안타까운 일도 그만큼 줄여줄 거고, 저도 이 여름도 결국 또 언제 그랬느냐 할 거다. 갈 길도 멀지 않은데, 어쩐 일인지 주춤거리고 헤매는 시간이 밉지만은 않다.

* 준탱이 돌아왔다. 온산항에 잠시 정박하고 있다 모레쯤 입성할 모양이다. 일 년여 만이다. 그래도, 시간, 참.

오늘 늦냐길래 잠깐 야근하고 아직 임잔 없지만 간단히 소주 한 잔 할까 한댔더니 집까지 바래다주는 사람이랑 놀란다. 젠장, 그런 사람은 고사하고 허공에 대고 혼자 먹게 생겼다. 어디로 갈꺼나, 어디에 있을까.

대화

from text 2008/07/31 23:31
엊저녁, 0124님은 여전히 교육으로 늦는데다, 비도 오고 마음도 그렇고, 서연이랑 둘이 간단히 저녁 챙겨먹고는 집 근처 자주 가는 일본식 꼬치 전문점으로 가볍게 나들이하였다. 단둘이 술집에 간 건 처음이다. 상 아래로 다리를 넣을 수 있는, 늘 앉는 자리에 마주 앉았더니, 언제나 정겨운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께서 몇 분 더 오시는지 묻는다. 답니다 했더니, 조금 놀라는 눈빛으로, 혼자 오셨어요? 하는데, 이 녀석이 대뜸, 저도 있어요 소리치는 바람에 주변 손님들의 이목을 끌고 여럿 웃음을 자아냈다. 유쾌한 술자리가 되리란 예감을 하며 같이 안주를 고르고 소주 한 병 주문하여, 서로의 잔에 저는 술을 따르고 나는 물을 부어 심심찮게 건배하며 대작하였다.

흔히 갖는 술자리와 달리 진지한 대화부터 시작하였다. 아빠는 서연이한테 바라는 게 하나 있다, 밥을 먹을 때나 이렇게 식당에 앉아있을 때 가만히 앉아서 먹었으면 좋겠다 했더니, 짐짓 심각한 얼굴로 알았단다, 그렇게 하겠단다. 서연이도 아빠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 했더니, 담배는 피우지 말고 술은 조금만 마셨으면 좋겠단다. 잠시 실랑이하다 담배는 줄이고 술은 덜 먹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고는 묵찌빠, 가위바위보, (제멋대로)가위바위보 하나 빼기, 중간말잇기, 끝말잇기를 거쳐 녀석의 미래에 대해 잠시 들을 수 있었다.

뜬금없이 이천이십일년에는 서연이 몇 살이에요? 그럼 이천삼십삼년에는요? 이천사십이년에는요? 등등 묻고는, 답해주는 나이에 따라 고등학교 삼학년이네, 어른이네, 아빠 나이랑 똑같네, 어쩌네 하더니,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원별애랑 결혼한단다. 저희들끼리는 결혼을 약속한 이현지라는 단짝이 있는 줄 아는 터라, 현지는? 했더니, 이현지는 나중에 저를 안 좋아할 지도 모르는데, 원별애는 나중에도 저를 좋아할 거란다. 그래서 원별애랑 결혼할 거란다. 아빠 나이랑 똑같네 할 때에는, 서연이도 그때 아빠한테 서연이가 있는 것처럼 아기 있겠네 했더니, 원별애가 낳으면요? 하고는 실실 웃는다.

다음날 오마시던 빙부께서 들르셔서, 술과 안주를 삼분의 일 가량 남기고, 아쉬움을 두고,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선선했다. 열대야 탓도 있겠지만 한동안 또 잠을 설치고 새벽에 깨는 일이 잦더니 모처럼 깊이 잤다. 가게에서 나와 손을 잡고 걸을 때는 뭔가 꽉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녀석과 대작하는 동안 받은 교감과 유대의 느낌을 되새기며, 나누는 자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간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자유에 집착하여 그 소실을 그리 염려하고 언짢아하였던가 돌아볼 수 있었다.

* 말하는 김에, 오늘 아침 녀석과의 출근길에서의 대화.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오늘은 누가 데리러 올 거예요? 묻는다. 아빠가 데리러 갈 거라 했더니, 일 있으면요? 하고 되묻는다. 오늘은 일 없으니 아빠가 데리러 갈게 해도, 갑자기 일 생기면요? 그럼 어떡해요? 집요하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할머니 댁에 가 있으면 되지 했더니, 그러니까요, 지금 슈퍼 가요, 헤헤 웃으며 손을 잡아끈다. 과자든 사탕이든 빙과류든 딱 하나만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정해놓고 사주는데, 혹여 하는 생각에 저녁까지 못 기다린단 심산 거다.

하나 더. 조금 전, 제 어미가 왔을 때 둘의 대화. 방학이라 유치원 도시락 반찬으로 고민인 어미가, 장 봐서 월요일엔 김밥 싸줄까? 하는 말에, 그럼 김하고 밥하고 재료하고 싸주세요, 서연이가 싸서 먹을게요, 천연스레 대꾸한다. 제 어미 음식 솜씨를 교묘히 타박하는 건지, 말 비틀기인지, 나도 따라가려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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