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

from text 2008/07/15 15:48
그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쓰다듬고 만지고 작동시킬 수 있다. 여전히 마음대로 부릴 수야 없지만 나를 위해 나름의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 같이 처음 저도 나를 길들일 때 느꼈을 나의 배려를 잊지 않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대체로 내가 상대를 좋아할 때는 그도 나를 좋아하기만을 바라지만, 그도 나를 좋아할 때는 그 크기와 성질을 재고, 울고 웃는다. 한 발 먼저 다가가기를 겁내지만 한 발 물러날 때는 냉큼 한 발 다가가고 만다. 우리도 그랬다. 다만 다 가질 수 없다는 분명해 보이는 사실이 더 가지려는 욕망을 적절히 제어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이 독특한 거리는 저와 나를 우리일 수 있게 하지만 언제든 우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낮은 자리에 맞출 수밖에 없는 처지가 높은 교감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선 자리가 늘 불안한 것이다. 사람들은 직립보행 이후 많은 걸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의심과 질투와 질병을 얻었다. 마주보는 사랑을 하고부터 사랑을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태초처럼 가늘게 반응한 이래 때때로 그와 내가 서로에게 감응하던 반짝이는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저와 나는 저와 나의 도덕으로 충분하였다. 하지만 언제든 손끝을 놓아버리거나 손끝에서 달아나는 꿈을 지속적으로 꾼다는 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낡고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골병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해석에 실눈을 치뜨다 이어지는 길이 이어지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늘 그랬듯,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게나, 앙상한 이름으로만 남지는 않을, 나의 특별한 친구.

이야기 둘

from text 2008/07/08 16:28
오래 전 어디서 본 이야기 하나. 학동들이 모여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난데없이 맹구, 나는 쓸 줄은 아는데 읽을 줄을 몰라. 기가 막힌 학동들, 그럼 한번 써봐. 그러자 맹구, 붓을 들더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그 한가운데 점을 하나 찍는 것이었다. 의아한 학동들, 그게 뭔데? 맹구 왈, 난 쓸 줄은 아는데 읽을 줄은 몰라.

그렇다. 읽는 건 읽고 싶은 놈들 몫이고, 뜻이야 있든 없든 그런 거야 알든 모르든, 사는 건 사는 놈들 몫인 거다. 커다란 동그라미 한가운데 콱 박히는 삶(이든 뭐든)을 써내려가는 놈 보고, 너 뭐야? 하지 말라는 거다.

역시 어디서 본 이야기 하나 더. 대한민국에 남녀혼탕이 문을 열었다. 남.녀.혼.탕. 대문짝만하게 내건 간판을 보고 남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탕 안엔 남자들만 우글거릴 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열 받은 손님들이 주인에게 따졌다. 남녀혼탕이라더니 이게 뭐요? 주인 왈, 여자 손님이 안 오는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그렇다. 그건 주인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안 오는 걸 어쩌란 말이냐. 강태공이 낚던 세월도, 기다린다는 때도, 아니 오면 그 뿐, 누굴 탓한단 말이냐.

* 점심 먹고 시시덕거리다 문득 떠올라 주변에 내놓은 이야기들. 어떤 걸로도 이 무시무시한 더위가 싹 가시기야 하랴마는, 잠시 웃고 잠시 느끼는 가운데, 온몸으로 뚫고 나가든 슬쩍 비껴가든, 한 세상 지나가고 말 테지, 뭐 그런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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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 스물다섯 번째 롤

from photo/M6 2008/07/05 22:29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저 먼저 흘러가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때때로 그 시간을 좇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이 시간도 저대로 흘러가고 만다. 아무려나. 우연찮게 손에 들어온 유효기간 일년 지난 필름, 마지막 한 장 찍고 나서 벤치에 앉아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초록이 대세였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골드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