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from text 2007/12/30 07:18
새로 공부하듯 술을 마시던 도중 만난 눈, 그 눈팔매에 기어코 말을 하고 말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싸래기처럼 왔다던 것 말고는, 호쾌한 첫눈이었다. 거리를 곰처럼 뒹굴던 사람들이 예뻤다.

* 커다란 백지에 이름 석자 써본다. 이을 말이라곤 없어도 그냥 그렇게 한 귀퉁이에 그 이름 불러본다. 거기도 여기처럼 하늘이 던지는 돌에 멍드는 가슴이 있는가. 그 팔매에 패인 시퍼런 가슴 있는가. (서른여섯 시간 후, 이천칠년 마지막 날, 다시 내린 눈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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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비

from text 2007/12/28 21:01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영원한 걸 꿈꾸고 그리워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그렇다고 하면 으레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나 지도, 또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에 그만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알 수 없는 말들을 또다시 늘어놓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곤 영원히 없을 거라는, 누가 찍은 건지 알 수 없는 낙인 때문이다. 그 자국이 아직 시뻘겋게 타고 있기 때문이다. 종일 겨울비가 그렇게 내리더니 내어놓은 가슴에 남은 흔적은 지울 생각도 않고 저만치 달아나고 말았다. 자, 누굴 원망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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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4

from text 2007/12/20 23:31
모래 위에 모래로 쌓은 탑 같은 거였어. 예뻤냐고? 술잔을 놓으며 남자가 말했다. 그때 내가 볼 수 있는 건 나를 보는 나밖에 없었어. 여자가 잔을 채웠다. 낮게 깔렸던 꽃잎처럼 잠시, 여자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언제나 짧은 여생, 생업이든 사랑이든. 모든 별들이 나무 틈으로 집중하였으므로 노랗게 치장하던 달은 술잔 아래 숨고 말았다. 여자는 낮게 깔리는 꽃잎을 따라 천천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술잔이 놓였던 자리에 슬몃 물기가 스몄다. 나무 틈으로 비를 머금은 새떼가 가득 날아들었다. 소란한 시간이 왔군. 남자는 오랜 그리움인 양 여자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모래를 두 숟가락이나 먹었더니 배가 불러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진흙으로만 한 공기를 거뜬히 비웠답니다. 찰진 똥을 누었더랬지요. 새처럼 지저귀며 여자는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그리움을 만졌다. 별의 나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나이보다 적은 걸요. 여자가 꿈결 같은 머리칼을 더듬는 동안 남자는 다음 세상을 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