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꿈결같이

from text 2008/06/03 23:55
옛날 세상 같으면 서러운 심회를 필묵에 맡겨 혼쇄(渾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저(江渚)에 낚대로 벗을 삼아 한평생 꿈결같이 살아 나갈 수도 있을 터인데, 현대라는 괴물은 나에게 그렇게 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풀이에 따르면, 혼쇄란 발묵(發墨)으로 흐리게 하고 필선(筆線)으로 선명하게 한다는 뜻. 몇 해 전 사다놓고 읽다만, 열화당에서 2000년 새로 펴낸 김용준의 '새 근원수필'을 들추다가,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출판될 당시 발문에서. 다시 읽으며 왜 그렇게들 추켜올리는지 진미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술병이 과한 겐지, 한 모롱이 돌아가는 겐지, 그저께는 하루 종일 허리가 내려앉듯 아프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한쪽 어깨와 목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팠다. 동물은 동물인지라, 마음 아픈 것 만한 게 없다는 건 순 거짓말인 줄 알겠더라. 옆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조금 나은 듯하긴 한데, 시커먼 얼굴에 부실한 몸뚱아리를 보고 있자니 다 던져두고 어디 큰 그늘 아래에서 바람이나 쐬고 요양이나 하다 왔으면 딱 좋겠다 싶다. 사는 게, 바쁜데 안 바쁜 건지 안 바쁜데 바쁜 건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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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 스물네 번째 롤

from photo/M6 2008/05/27 22:42
지난 22일 저녁, 수성아트피아에서 끌로드 볼링의 재즈 공연을 봤다. 트리오, 퀸텟, 보컬까지. 보는 내내, 제대로 해석하는 놈도 대단하지만 만들어내는 놈에 비할까, 생각이 맴돌았다. 인생 참 제대로 즐기는 노인네들과, 잘 어울리는 청춘(?)들이었다. 공연 끝나고는 늦었지만 한 오년여 이어오던 한 모임의 사실상 마지막 모임이 있어 들렀다가 마침 자리가 파하여 몇몇 얼굴들만 보곤 괜한 마음에 찬 소주만 약간 비웠더랬다.

남들 쉬지 않는 날 쉬는 건 참 맛깔스런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오늘처럼 더운 날 나돌 생각을 했다니, 이발하고 신천 조금 걷다 곧바로 궤도 수정하여 CGV에서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 잠깐 선선한 저녁 바람을 즐기곤 들어오고 말았다. 밤부터 비가 온다는데, 수성아트피아에서 0124님 기다리는 동안 잠시 찾았던 행운 또는 행복의 이파리도 함께.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후지 오토오토400

아름다운 세상

from text 2008/05/22 14:02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명을 내뿜는 나무를 대할 때, 숨쉬는 대지를 만끽할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작고 슬픈지, 물기 차오르는 일인지, 거리에서 식구를 마주쳤을 때, 제 몫을 감당하고 있는, 여물어가는 아이를 볼 때, 내 어깨와 눈빛에 기댄 어린 짐승을 생각할 때, 한 순간, 세상은 얼마나 까마득한지, 돌아서던 자리가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을 때, 다정한 눈빛을 교환할 때, 기어코 다가서는 마음을 묵묵히 억누를 때, 하늘이 감응할 때, 떠나간 사람을 곱게 떠나보낼 때, 살아있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세상이 얼마나 새파란 거짓말인지, 멀리 멀리 돌아 한 몸뚱이 누일 때, 세상이 얼마나 그리운 것인지, 서럽도록 아름다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