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6 스물세 번째 롤

from photo/M6 2008/05/18 23:43
얼마 전, 포항 간 첫날, 죽도시장 안 횟집에서 점심 겸 소주 한 잔 하면서 그저 건배하기 맨송맨송하여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하고 셋이서 잔을 부딪친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서연이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술을 따르는 것은 온전히 이 녀석의 몫이며, 건배할 때 행여 빼놓았다간 심술기에 한참 술맛이 달아나기 일쑤다. 물 잔이나 음료수 잔으로 꼭꼭 같이 잔을 부딪쳐야 하며, 자주 먼저 잔을 드는 바람에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지기 예사다.

어제 '아지야'에서 청주, 오늘 '예궁'에서 고량주 마시는 자리에서 이 녀석의 건배사가 걸작이었다. "우리, 가족을, 위하는데, 건강하고, 행복은, 창문을 타고 오는데, 바람이 불고, 그런데, 위하여." 아지야에서 첫잔 비울 때 열린 창문을 보며 한 녀석의 건배사이다. 우리가 웃고 즐거워하니까 재미를 붙였는지, 매번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재미난 건배사를 해냈다. '합류하다가', '회항하여' 같은 표현까지 곁들여 길게 이어갈 때는 꽤나 놀라기도 했다. 기억나는 게 많지 않아 아쉽다.

철들려면 멀었다지만, 나이를 그렇게 썩 헛먹지는 않았을 터, 빨리 잊는 법, 쉽게 타협하는 법도 익혀 왔는걸, 시시한 세상이 가까워지면 안타까운 일도 그만큼 줄어들 테지. 성장(盛裝)한 여인처럼 불쑥 다가선 봄은, 그렇게 갈 테고, 시시한 세상도, 이 봄도, 언제 그랬냐 할 테지.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프로이미지100

마흔

from text 2008/05/17 12:49
뭐든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나이, 일부러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이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을 되살려 기어코 소진하고 마는 나이, 어제
과음한 다음 날, 살진 짐승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온통 하얗게 바랜 채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만났다.
문득, 세상이 그렇게 작고 예쁘게 보일 수 없었다.
일상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과
여전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세상은 여전했다. 제 방식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정답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석양이 보고 싶다. 운명을 닮은 석양, 며칠 그것만 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을 꿈꿔 왔나 보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나 보다.
꾸미고 가꾸는 만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 채
편리와 일상을 버린 채
불가능을 두드렸나 보다.
철이 들면 단순해진다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놓질 못하겠다.

from text 2008/05/15 15:11
산을 찾아, 골도 깊은 산을 찾아
죄 없는 꽃을 꺾던 순간
먹물처럼 발끝에서 달아난 검은 그림자
제 모양을 일구는 사이
발밑이 하얗게 무너진 자리에
흑백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던 날, 저무는 산을 찾아
죄 많은 꽃을 꺾던 그 순간
격발된 유황처럼 달아오르던 몸뚱이, 숨길 곳 없어
산을 찾아, 숨을 것 많은 산을 찾아
꽃을 꺾던 순간, 내 멱을 따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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