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from text 2008/02/10 13:14
지독한 목감기를 앓았다. 몸살 기운과 목감기 기운이 조금씩 있더니 차가운 술과 맥주를 마신 다음날부터 끙끙 앓았다. 목에는 다른 사람이 사는 듯 낯선 소리가 나왔고 때때로 그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혼자 동네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나오는데 스물다섯 즈음 은행에 처음 계좌를 개설하였을 때처럼 처음 하는 일인 듯 떨리고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더랬다. 일월 말부터였는데 다 나은 듯 하더니 어제 오후부터 몸살 기운이 도지고 목 전체가 퉁퉁 부어 아프다. 설날 저녁 처가 식구들과 많이 마신 술이 뒤늦게 화근인가, 조금 무리하여 피곤한 걸 제때 풀어주지 않고 한 차례 더 무리하면 영락없이 앓는 나이가 된 건가, 속절없이 웃고 만다. 연휴는 길고 마흔으로 가는 통과의례가 독하다.

처고모, 처고모부들과의 설날 술자리에서 오고간 둘째를 낳아야지, 아니 하나에 정성을 다 쏟는 게 낫다는 이야기에서 뻗어간 생각의 가지들은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자식을 위해 살 것인가, 그게 과연 둘인가를 거쳐 사랑의 속성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사랑이란 무한히 샘솟는 것이어서 배우자든 자식이든 늘어나는 대로 듬뿍듬뿍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정된 것이어서 이전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소홀해지는 것인가.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속성을 보여줄 것인가.

모든 걸 거는 사랑이 아름다운 진짜 사랑인가, 적당히 사랑할 줄 아는 게 현명한 진짜 사랑인가. 인생이란 것의 굴곡과 서로 간의 소통불가능성, 시간의 무시무시한 속성에 생각이 이르면 선뜻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가 하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게 정답이라는 말과 같다. 해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진술은 모두 진실이고 진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때때로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순간과 무시로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머리 속의 지식이나 갈고 닦은 지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몸이 반응하여 먼저 움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힘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누적된 모든 것, 말하자면 어린 시절 무지개색 나비를 본 일이나 아무도 몰래 잠시 하늘을 날아올랐던 일, 어느 날 밤 슬쩍 세상 한 자락을 들춰본 일까지 다 포함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드문드문 내 반쪽이 둥둥 떠다니며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꿈을 꾼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이전의 나는 아니지만,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꽃들에게

from text 2008/01/15 19:44
어제, 많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고 들어왔는데 아들 녀석이 열두시가 다 되도록 자지 않고 칭얼대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길 해 주마 하고는 겨우 옆에 눕힐 수 있었다. 토닥토닥 그 단단한 가슴을 두드리며 이야길 시작하는데, 그때서야 취기가 오르는 듯 나도 잠이 드는 듯 서로가 서로에게 잠겨들었다. 머리 한쪽에서는 어떤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정조가 저 혼자 떠다니기도 했다. 어째서 꽃 이야길 하게 되었을까.

봄에 피는 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단다. 그래서 화사해 보이지.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는데 그 간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진달래, 개나리, 벚꽃, 목련, 모두. 여름에 피는 꽃은 잎이 무성한 가운데 피니까 더 화려할거야. 장미도 백합도 해바라기도. 우선 꽃이 보여야 하거든. 가을에 피는 꽃? 수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지. 왜 그런지는 몰라. 다들 지는데 피어날려니 그러나? 겨울에 피는 꽃은, 동백이나 매화나, 떨어지면서 더 아프거나 향기만 오래 남는 꽃들이야. 그렇게 흔적을 남기는 거지, 왔다 가는 흔적을.

속씨식물들이 자신의 생식기관을 이렇게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피워 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이제야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목이 말라 부엌에 들어갔다가 겨울이 오고부터 부엌 가장자리에 들여놓은 여러 화분들 중 납작한 난 화분 하나가 꽃대를 대여섯 개나 밀어올린 걸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작은 봉오리에서 하얀 꽃이 활짝 필거라고, 대여섯 밤도 지나지 않아 향기가 가득할거라고 아들 녀석에게 일렀던 것도 생각난다. 밤새 꽃들에게 위안이라도 받은 듯, 아침 대기는 잠시 상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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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5

from text 2008/01/07 20:06
물빛에 비친 행성은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가 다른 세상을 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다. 작은 행성은 돌기를 멈추었고 세상은 잠시 정지하고야 말았다. 이윽고 누군가 낮게 토하던 한숨을 남자는 들었을까. 지키던 별들은 제집으로 갈 시간을 지켰으며, 물빛 속에 노랗게 빛나던 달은 다시 하얗게 바랬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돌에 새긴 믿음이나 약속도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법, 애초에 바람에 새겼던들, 가볍게 새겼던들. 남자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여자는 눈물 대신 붉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기 위해 한사코 웅크리던 때가 있었지. 세상을 흘끔거리던 그때, 산처럼 나를 누르던 것은 나였어. 해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 남은 황금처럼 빛났지만, 눈이 멀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작은 행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있으며 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나 있을까. 마음에 기대 몸서리치는 마음이 갈 자리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남자는 마른 손을 들어 허공에 놓았다. 딱 죽을 것만 같던 마음도 작은 흔적으로 갈무리된다지요, 산다는 일은 그 흔적을 후벼 파고서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것은 낯익은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제야 오랜 되새김을 마칠 때가 온 것일 뿐, 오랜 되새김이 비로소 시작된 것일 뿐. 죽은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이 행성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