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

from text 2009/04/28 21:55
바람이 불고 철 지난 벚나무 검붉은 입술이 울고 꿈결처럼 대낮부터 미등 불빛들이 꼬리를 물고 신천으로 흐르더니, 오후 여섯 시, 따닥따닥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창가에 선 나는 문득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넘어가는 찰나, 시커먼 하늘 아래 콘크리트 건물들이 비로소 제 색깔을 드러낸다. 삽시간에 인적이 사라지고 고깔을 닮은 우산 하나 하늘을 날아오르는데 문득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세상에 떨어진다. 칼국수와 묵밥을 사이에 두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그리운 것들 잠시 접어두고 고요한 휴식을 시작한다. 다음은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노숙 전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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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율 2

from photo/D50 2009/04/28 10:15
외탁을 많이 한 듯, 생김새도 그렇고 제 형에 비해 덩치가 좋고 선이 굵은 녀석. 나를 닮은 구석이 적어 섭섭키도 하더니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 차츰 정이 간다. 어릴 때 그렇게 점잖고 진중하더니 재바르게만 변해가는 제 형을 보아서 조심스럽긴 하나 어딘지 듬직한 구석까지 있어 더 반갑고 고맙다. 잘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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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from text 2009/04/27 23:58
그제 토요일, 오랜 잇몸치료 끝에 드디어 임플란트와 뼈이식 수술을 했다. 뼈이식의 양이 많고 앞니 쪽이라 많이 부을 거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부풀어 오를 줄은 몰랐다. 어제는 혹성탈출 주요 엑스트라의 형상이더니 오늘은 멍까지 들어 집단 린치당한 둘리의 몰골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는 원체 상태가 메롱인지라 조퇴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들 등을 떠밀어 그나마 흉한 꼴을 덜 보일 수 있었지만, 덜 아물어도 모레쯤엔 나가야 할 테니 참 이런 봉변이 없다 싶다.

어쨌든 덕분에 어제오늘 어쩐지 보기 싫어 밀쳐두었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을 수 있었다. 방금도 자판이 절로 그리 가기도 했지만, 읽는 한참 동안 '봄은 노래한다'처럼 읽히기도 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단편 서너 편만 읽고 덮었을 때처럼 역시 묘하게 글을 잘 쓴다 했다. 본문 중 한 대목. 그리고 며칠 반복해 들었던 문승현의 '오월의 노래'.

여자와는 그렇게 헤어지는 거야. 아마도 이정희 선생도 저승에서 꺄르르꺄르르 웃고 있을 것이네. 그만하면 자네도 할 만큼 했으니까.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수 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에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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