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나비가 나풀나풀 2022/10/22
  2. 가을은 짧고 2022/10/11
  3. 성주호 2022/10/02
  4. 봉덕경 2022/09/14
  5. 한 소식 2022/09/04
  6. 비 오는 날 2022/08/29
  7. 이제 우리는 2022/07/26
  8. 세상에는 2022/07/12
  9. 유칼립투스 2022/06/03
  10. 제대로 2022/05/11
  11. 사람이 잠깐 2022/05/04
  12. 다른 삶 2022/04/04
  13. 파국 이후 2022/03/28
  14. 마음의 준비 2022/03/20
  15. 권주가 2022/03/19
  16. 봄꽃 2022/03/14

나비가 나풀나풀

from text 2022/10/22 17:18
간혹 한두 잔만 먹고 더는, 적어도 한 백여 일은 술을 퍼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사나흘, 굳게 결심하고 굳게 실행하고자 애를 써서 그렇겠지, 벌써 백 일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몸도 한참 술이라곤 안 마신 것처럼 가볍고 정신도 가을 하늘처럼 드높고 맑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까. 서른을 갓 지났을 어머니와 굽이진 이십여 리 고갯길을 걸은 적이 있다.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이었을 것이다. 힘이 들어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쉴 때 나비 두어 마리가 나풀나풀 앞서 날아갔다. 혼자 속으로 좀 태워 주거나 등 좀 떠밀어 주지 그랬던가, 어머니는 신을 벗어 손에 들고 내처 걸었다. 외가 아랫마을 한 집에서 물을 얻어먹으며 보았던 스텐 세숫대야에 헤엄치던 자라는 이상하리만치 생생한데, 이후 기억이 없다.

가을이 한창이니, 가을도 다 갔다. 책을 산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노태맹의 시집 이팝나무 가지마다 흰 새들이. 산문집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태맹이형은 정말 잘 늙어가고 있구나. 다음은 시집 뒤에 실린 시인의 산문 레퀴엠, 천사의 시학만은 아닌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단락과 맨 마지막 문단. 시집은 전체가 하나의 레퀴엠이요, 하나의 커다란 시였다.

빛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물속을 밝게 할 수는 없다. 물이 밝아지는 것은 물들이 맨살 전체로 햇살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빛의 무한 거리를 물이 꺾어 주면서, 그리하여 빛이 무한에서 유한에로의 꺾임을 통해 반짝임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사물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그 무한을 유한의 몸으로 견딤으로써 빛을 드러낸다. 생이 죽음을 견뎌내고 받아들임으로써 빛나는 것처럼. 무한은 유한에 종속된다. 이제 무한의 빛은 유한한 우리의 것이 된다. 시는 이 물과 같다. 그러나 나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로 한정 짓고 자기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한의 빛이 유한의 물 표면에 부딪힐 때의 그 섬광을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아름다운 붉음은 늘 나타나고 있는 상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라짐이 자주 더 아름다운 붉은빛을 띠기도 한다. 사라지는 모든 이들이, 그리고 나도,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가을은 짧고

from text 2022/10/11 14:25
겨울은 길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돌이키지 않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은 돌아가지 않는다. 가을은 짧다. 구린 열매를 먼저 떨어뜨리고 색을 조금 바꾼 나무는 번식이나 증식에 관심이 없고, 바람에 질린 꽃들은 바람 따라 바람처럼 나부낀다. 해가 진다. 남에서 북으로 신천을 따라 걷다 희망교를 건너 어디 면 소재지에서나 볼 법한 술집으로 들어선다. 삼겹살과 돼지찌개를 팔고 밥값은 따로 받지 않는다. 멸치 우린 된장찌개도, 잘 익은 김치와 방금 무친 콩나물이나 신선한 푸성귀도 다 거저다. 달무리가 진다. 갱도에서는 불을 꺼야 빛이 보인다고 한다. 글쎄, 다 같이 불을 끌 수 있을까. 저기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하나둘 불을 끄고 있는 것일까. 가을은 짧고, 갈 길이 멀다.

성주호

from text 2022/10/02 19:02
성주호 둘레는 오르내리는 길이 많았다. 부교 주위에는 새끼 물고기가 가득하였고 곳곳에 젊은 낚시꾼이 있었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미늘 없는 바늘이 떨어졌다. 무심한 파문은 건너편에 닿았고, 그늘진 맥문동 밭은 온통 까만 열매들로 반짝였다. 더운 햇볕과 서늘한 바람이 들고 나며 임무를 교대하고 있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 다녀온 게 얼마만인가. 잘 따라온 둘째 녀석, 먼 길 운전한 0124님이 고맙다. 길을 나설 때부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였다. 연휴 가운데 일요일, 한중망이어도 망중한일런가.

봉덕경

from text 2022/09/14 13:20
-- 鳳德의 모든 것은 원래 있었으나 원래 없었던 것이다. 나고 죽는 것도 이와 같다.
-- 바르게, 천천히 갈 일이다. 무엇이 바른 것이냐. 바르지 않은 것이 바른 것이다.
-- 봉덕에도 사계절이 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눈도 내린다. 달이 뜨고 해가 진다. 꽃이 피고 그늘이 진다.
-- 봉덕에는 늘 적당한 취기와 그만한 광기가 있다. 온전한 것은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 병들고 아픈 것이 병들지 않고 아프지 않은 것을 지배한다. 병들지 않고 아프지 않은 것은 병들고 아픈 것을 두려워한다.
-- 노래와 이주는 허용되지 않는다. 다섯을 처형하면 다섯이 태어난다.
-- 흐르거나 고이되 차거나 넘치지 않는다.
-- 누구에게나 음주는 허용되나 누구에게도 음주를 권할 수는 없다. 다섯이 태어나면 다섯이 죽는다. 예외는 없으며 예외 없는 것은 없다.
-- 보고 싶은 것은 볼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은 갈 수 있다.
--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볼 수 없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은 갈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할 수 없다.
-- 누구도 봉덕에서 길을 잃으면 두 번 길을 찾지 않는다. 봉덕이 길이요, 길을 잃은 자가 봉덕이기 때문이다.
-- 왔던 데로 가는 일은 없다. 임박한 일이란 이미 날 샌 일이요, 모두가 가꾸되 거두지 않는 청춘일 뿐이다.
-- 생산을 하지 않으니 새로운 질서 따위는 없다. 가끔 달이 지지 않고 해가 뜨지 않는다. 먼 땅이 다섯 번 흔들린다.
-- 예를 갖추어 서로 죽이고 서로 죽여 예를 갖춘다. 봉덕의 끝은 다른 봉덕이다. 다른 봉덕은 다시 봉덕이며 원래 있었으나 원래 없었던 것이다.
-- 아무는 일이 없고 아물지 않는 일이 없다. 변하는 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일이 없다.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 능히 두 발을 뻗는다. 合掌.

한 소식

from text 2022/09/04 07:08
비극은 끝이 났다. 전말이 드러났고 세상은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누군들 한때 찌질하지 않았겠는가. 미래는 가고 있고 현재는 오고 있으며 과거는 과거끼리 충돌한다. 어떤 기억은 바뀌고 어떤 기억은 잃어버린다. 시간은 빠르거나 느리고, 칠엽수 열매에는 억겁의 시간이 있다. 제라늄과 선인장, 꽃치자, 킨기아눔에도, 호야, 개운죽과 달팽이, 물고기, 고양이에도. 가까워서 이리 먼 것인가, 멀어서 이리 가까운 것인가. 한 소식 듣는 일이 다른 우주 이야기 마냥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어마어마한 태풍이 온다는데 누운 자리마다 꽃이 피기를. 일찍 온 가을이 마저 거두어 주기를.

비 오는 날

from text 2022/08/29 19:47
비 오는 날 너를 한입 베어 물면 어쩌다 복숭아나 자두 한쪽에서 느꼈던 벌레 덜 먹은 맛 같은 것이 난다. 쪼로롱 산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초록 위 배롱나무 붉은 꽃이 나를 맞던 새색시 같다. 며칠 전 꿈에서는 난생처음 대여섯 살 난 딸을 만났다. 보고싶었더냐 묻는 말에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손을 잡고 오래 걷기도 했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깨고 나서도 한 이틀은 실제 같았다. 비 오는 날 산을 한입 베어 물면 벌레 덜 먹은 것 같은 맛이 난다. 빗방울에 반짝이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오래 못 만난 내 딸만 같다.

* 배롱나무 꽃이 지면 가을도 더는 갈 길 없겠다. 남은 여름이사 숨을 곳 모르랴. 몇 번이나 남았을까. 기약 없이,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from text 2022/07/26 12:41
이제 나는 이게 별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런 나이가 되었고 그럴 나이가 되었다.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설령 일어나도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른다. 별 게 아닌 것이 별 게 아닌 게 아니었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애당초 별 게 아닌 게 아닌 일은 없었다.

한창 술이 좋을 때는 숙취도 좋았다. 이제 술이 별 게 아닌 지경에 이르니 숙취가 별 게 아닌 지경에 이르지 못한 조홧속이 새삼스럽다.

여름이 가고 있다. 나중 일이라 여기지 마라. 이제 너를 아쉽지 않게 배웅하고 종내 기꺼이 마중할 참이다.

세상에는

from text 2022/07/12 11:11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이미 어디 망가져 버린 걸까. 몸을 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하거나 지칠만큼 지칠 때면 안다. 세상에는 가소롭지 않은 일이 없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없다. 여름 신명도 있을까. 모르면 없는 것과 진배없으니 여기 물정이 이리 어리석다.

다음은 장자 제물론편에 나오는 장오자의 말 중 일부. '내 어찌 삶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미혹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나 돌아갈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그리고 인간세편에서 공자의 말 한 대목. '걸음을 멈추고 가지 않는 것은 쉽지만 걸어가면서 땅을 건드리지 않기란 어렵다.'

유칼립투스

from text 2022/06/03 13:50
봄이라 라일락이나 아까시꽃이 만발하거나 어쩌다 잘 차려 입은 여인네가 분내 날리며 스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함께 속내 나눌 사람이 그리워 더 멀리 걷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한때 시커먼 속내 몰래 나누던 누군가를 생각하기도 한다. 공기에 열기가 절반, 수분이 절반. 어차피 가뭇없을 일들이 새삼 새삼스럽다. 서사가 없어도 다툴 정분이 없어도 그 향내, 그 분내 속에 글쎄, 사는 게 조금 하찮기도 하고 조금 겁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봉덕동 유칼립투스. 늘 블루스 음악이 흐르고 자는 시간 외에는 마셔야만 할 것 같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여섯 개 정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초상이 있고, 마른 꽃이 걸린 한쪽 벽에는 유칼립투스가 그리스어로 덮여 있다 혹은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고 코알라에게 신경안정제 역할을 하며 꽃말은 추억이라고 적혀 있다. 잔뜩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데가 아닐 수 없다. 안주는 대체로 치즈나 과일 몇 조각. 어쩌다 봄이면 주인장이 장만한 옻순이나 가죽순을 맛볼 수도 있다.

여름이 내려앉은 밤거리는 아무렇게나 울고 노래하는 취객을 허용한다. 서로는 서로 분내 같은 추억만 남기고 가뭇없이 가버린 사람처럼 안부를 주고받을 뿐.

제대로

from text 2022/05/11 12:32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의 길 전문. 1936년 잡지 조광에 발표되었으며, 1992년 깊은샘 출판사에서 시, 수필, 시론을 묶어 같은 제목의 책으로 펴내면서 당시 맞춤법에 맞게 실었다. 수필로 쓴 것을 시로 많이들 혼동한다고 하는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모처럼 글 한 편에 온 몸과 온 마음이 저렸다. 이즈음 파친코에 이어 나의 해방일지에 푹 빠져 있으며, 이 정부에 주류세라도 안 낼 고민을 하고 있다. 황폐한 마음을 달래느라 많이 소홀하였다. 좋은 핑곗거리도 있으니, 다른 즐거움도 찾고 몸도 좀 가꾸어야겠다. 제대로 버티고, 제대로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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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잠깐

from text 2022/05/04 08:55
어제, 휴가를 내고 모처럼 산에 올랐다. 늦게나마 진달래 군락지를 볼 욕심에 화왕산을 고르고, 무릎에 무리가 갈까 완만한 길을 찾아 옥천매표소에서 임도를 타고 옥천삼거리를 지나 정상으로 올랐다. 정상 부근 너른 평원에 진달래는 다 지고 금빛 억새만 장관이었다. 언젠가 가을에 은빛 억새밭을 본 기억이 어슴푸레하였다. 다섯 시간을 오르내리고 마침 창녕 장날이라 장 구경을 하고 송화버섯, 두릅, 제피 등속을 샀다. 시장 어귀에서 수구레국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내친 김에 우포늪을 찾아 오래 걸었다. 해지는 풍광과 아까시 꽃향기가 좋았다. 돌아와서는 하산주로 방천시장 인근 동곡막걸리에서 모듬전에 막걸리를 한잔하였다.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집이었다. 0124님 덕분에 하루가 온전하였다.

지을 작(作)은 사람 인(人)과 잠깐 사(乍)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이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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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from text 2022/04/04 11:14
다른 삶을 살았다면 룸펜으로 살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용기가 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 떨어진 낭만이나마 비굴하지 않게 한 세상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정 많은 사람들을 만나 영 굶주리지는 않았겠지. 한때 룸펜 같던 삶과 그 정신의 한 자락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다가오지 않는데 다가갈 일 없다. 자꾸 오락가락하는 건 나이와 술 탓이겠지. 다 부질없다가도 다 붙들고 싶기도 한 것이.

파국 이후

from text 2022/03/28 13:50
육 개월이면 사라질 감정이어도, 더는 특별하지 않아 다시 볼 수 없을 사람이어도, 행여 어떤 후회가 일어도 멈추거나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상처를 훈장처럼 가슴에 단 채, 파국 이전에는 무얼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다. 흉터처럼 남은 사랑은 때가 되면 다른 흉터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지만, 상처를 만드는 통쾌함과 아무는 가려움을 잊지 못한다. 여전히 멈추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파국 이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매화가 지고 목련이 피었다. 서양수수꽃다리는 새잎을 내밀었다. 어김없는 반복에도, 노인은 졸고 아기는 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오고, 가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간다.

마음의 준비

from text 2022/03/20 20:30
반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 남은 날들 중에 지금이 가장 좋을 때요, 이제 가장 좋을 날들만 순차적으로 남은 셈이다. 쇠약해 가는 육신을 따라 어쩌면 생각은 조금 여물고 마음은 덜 부대낄지 모르겠다만.

휴일 아침,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화양연화를 다시 보았다. 잠시 비밀을 봉했던 진흙이 풀리고 풀씨와 꽃씨 같은 것들이 날아다녔다. 누구에게나 벼르던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 '먼지 쌓인 유리창'은 아랑곳없이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거기나 여기나 시간과 기억이 헝클어지기는 매한가지,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제목은 작중 양조위의 대사 '나 좀 도와줄래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요'에서 따온 것. 이별 연습으로 유명했던.

권주가

from text 2022/03/19 12:19
며칠 흐리고 비가 내렸다. 봄은, 봄이 오기 전은 언제나 사계절이 섞여 어제는 초여름이었다가 오늘은 초겨울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젊음이었고 못 견디게 사무친 것은 네 눈빛이 아니라 피안의 손짓이었다. 바람이 불어 한겨울이더니 바람이 불어 봄이로구나.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절이었고, 네가 아니라 나였다. 만개했던 매화 꽃잎이 비에 젖어 구겨진 채 바람에 날린다. 이 봄에는 꼭 꽃구경도 하란다. 산에 올라 진달래도 보고 꽃길도 걸으란다. 가고 오지 않음만 일일까. 잔도 없이 찬도 없이 무어라 무어라 자꾸만 권주가를 부른다.

봄꽃

from text 2022/03/14 08:47
부질없는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봄, 너는
불꽃이로구나.
부질없는 것을
부질없게 만드는
너는 불꽃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