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큰 나무에게 2023/10/24
  2. 다른 세상 2023/09/21
  3. 신천에서 2023/08/26
  4. 유두절 2023/08/02
  5. 즐거운 중독 2023/07/11
  6. 길 위에서 2023/06/18
  7. 덩굴장미 2023/05/19
  8. 철쭉 2023/04/24
  9. 사월 2023/04/14
  10. 그래 2023/04/13
  11. 어떤 봄 2023/03/23
  12. 긴 여정에 2023/02/16
  13. 또 봄이 오고 2023/02/09
  14. 어떤 주정 2023/01/17
  15. 언젠가 사월이면 2023/01/12
  16. 첫눈을 보며 2 2022/12/22

큰 나무에게

from text 2023/10/24 04:50
나는 세월을 다 보았노라.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거나 햇살이 일렁이는 것, 인간들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과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을. 도토리를 감추는 다람쥐도 다람쥐를 노리는 올빼미도 늘상 진지할 일은 아니었다. 이파리를 떨구는 무리도, 썩은 이파리에 알을 까던 풍뎅이도. 서로 잡아먹거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인간들도. 나는 다시 오는 세월과 다시 오지 않는 세월을 다 보았느니, 뿌리가 가지처럼 하늘에 닿고 가지가 뿌리처럼 세속에 닿았다. 두 손 모아, 合掌.

* 지난 14일 단체로 속리산 세조길에 다녀왔다. 나무와 길이 좋았고 수정암 아래 계곡이 좋았다. 속리에 감흥이 일어 뒤풀이 자리에서 건배사로 육행시를 읊었다. 속세를 떠났으나 떠나지 못한 자의 이야기로되 다시 보니 떠나지 않았으나 이미 떠난 자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속리산에 와 /리별한 여인을 생각하누나 /산은 언제나 말이 없건만 /세월만 야속하여라 /조용히 잔을 드노니 그대여 /길이길이 행복하시라

* 5년 5개월 이어 오던 물생활을 접었다. 아끼는 유목 두 점만 남기고 생물과 물품들을 모두 0124님 지인에게 넘겼다. 시원섭섭한 게 이런 기분이구나. 휑한 거실 탁자에 유목 두 점 올려 두었다.

다른 세상

from text 2023/09/21 20:26
다른 세상을 살란다. 나중 말고 지금, 저기 말고 여기서. 경계에서, 꽃을 흔드는 바람과 바람을 흔드는 꽃. 어허 나는야 다르게 살란다. 아무도 모르게, 달리 지고 달리 필란다. 그만 다른 세상에 살란다. 다른 세상, 다르게 살다 갈란다.

* 걷던 길 어디쯤 온통 노란 꽃들 틈에 주황으로 타오르는 꽃이 있었다. 나도 너를 따라 다른 세상에서 다른 세상이나 살란다 하고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오래 되뇌다 돌아왔다.

신천에서

from text 2023/08/26 09:02
누가 나를 대속할 수 있으며, 내가 누굴 대속할 수 있으랴. 내가 너를 정관할 때 물색 고운 너도 나를 정관하고 있었구나. 배롱나무 꽃잎이 내를 따라 나란하다. 저기 어디 산새가 날았던가. 전신이 따갑더니 가벼운 정신에 근육이 붙는다.

다 잊었으니 꿈에라도 울 일 없어라.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을 알 길이 없고, 내세와 윤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구나.

짧은 여름이 가고 이제 더 짧은 가을이 오겠지. 다른 계절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음 세상은 다음에 만들 터. 백로, 왜가리가 생각처럼 섰고 청둥오리가 졸졸졸 물소리를 따라간다. 코스모스와 루드베키아가 만발한 길에는 누가 버린 기억들이 있다.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과 꿈의 조각 같은 것들이 있다. 어제의 배롱나무 꽃들이 내를 따라 흐른다.

유두절

from text 2023/08/02 16:15
속죄하는 마음으로, 허나 결코 달게 받지 않겠다는 정신으로 걷고 또 걷는다. 상류를 향해 용두교에서 가창교에 이르는 길에는 이미 가을이 묻어 있다. 다른 세상인 듯 끄트머리 어디쯤에는 옛 마을의 정취도 있고 함께 뛰어노는 애들도 있다. 지구만 한 보름달이 당산나무에 걸렸구나. 어지럽고 고즈넉하여 잠시 멈춰 섰다 돌아서 다시 길을 걷는다. 지나온 길이 길이 아니구나, 내가 내가 아니구나 하다가 나도 따라 어디 다리 밑에 걸린다. 얼쑤, 굿춤 추듯 춤을 춘다.

즐거운 중독

from text 2023/07/11 10:40
늦기 전에 시작하여 다행이다. 어스름을 전후하여 길 잃은 노래를 부르고 순례자처럼 땀을 흘린다. 길이 없는 길을 걷는다. 어디든 길인 길을 걷는다. 꽃이 있고 물이 흐르고 어디든 나무가 자란다. 피가 돌고 시간이 거꾸로 간다. 가다 보면 네가 있고 너와 내가 떨어진 자리가 있다.

비 갠 후에는 잠자리 떼가 여럿 출몰하였고, 이끼 낀 돌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시작하였으니 늦지 않았다. 소멸이어도, 누구도 망가지지 않는 즐거운 중독이기를.

길 위에서

from text 2023/06/18 13:05
긴 꿈이었을까 저 아득한 세월이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
긴 꿈이었다면 덧없게도 잊힐까
대답 없는 길을 나 외롭게 걸어왔네
푸른 잎들 돋고 새들 노래를 하던
뜰에 오색 향기 어여쁜 시간은 지나고
고마웠어요 스쳐간 그 인연들
아름다웠던 추억에 웃으며 인사를 해야지
아직 나에게 시간이 남았다면
이 밤 외로운 술잔을 가득히 채우리

푸른 하늘 위로 웃음 날아오르고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
기억할게요 다정한 그 얼굴들
나를 떠나는 시간과 조용히 악수를 해야지
떠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면
이 밤 마지막 술잔에 입술을 맞추리
긴 꿈이었을까 어디만큼 왔는지
문을 열고 서니 찬 바람만 스쳐 가네
바람만 스쳐 가네​​

최백호의 길 위에서. 이주엽 작사, 김종익 작곡. 듣다 보면 볼륨을 자꾸 높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가히 긴 꿈보다 아득해지고 만다.

사는 모양에 조금 변화가 있으려나. 적게 먹고 자주 걷는다. 가끔 술을 마시고, 여전히 사람이 좋을 때도 있지만 엉망으로 취하지는 않는다. 유월 초에 거창 창포원을 구경하고 오일장에 들러 장을 보았으며, 며칠 전에는 안강 옥산서원에 다녀왔다. 거창에 들른 길에 오래 그리웠던 구구식당 어탕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기억은 풍화하기 마련, 신천과 고산골, 용두토성 일대가 이렇게나 좋았나 싶다. 얼른 다른 계절이 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시간이 더디 흘러 지금 모습을 더 자주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사는 모양에 조금 힘을 더하려 가볍게 입을 옷도 좀 사고 대략 백만 년 만에 모자와 운동화도 샀다. 버킷햇 스타일의 모자도 바다색 운동화도 마음에 든다. 그야 이미 다른 사람인데 나도 이미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덩굴장미

from text 2023/05/19 05:48
그림자가 없어 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자가 모자라
네 눈 밑 그늘을 훔쳐 그림자에 붙였다.
고운 주름이 그림자를 따라와
그림처럼 웃었다. 구분 없이
꿈처럼 웃었다. 흐린 꿈이 좋아
낮달도 불렀다. 줄지어
홍등이 그림자를 떨구었다.
떨어진 그림자는 떨어진 그림자를,
그림자는 그림자를,
너는 네 지난날을, 다시 장악했다.

철쭉

from text 2023/04/24 15:40
빛나는 청승도 저 세상도
피었으니 시들 일 있으리
윤이월 그믐에 꽃이사 피었겠건만
다 잊었겠건만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지 않겠느냐
드러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겠느냐
점점이
점점

사월

from text 2023/04/14 20:38
사월이 길을 나선다. 길이 벌떡 일어난다.
사월에 비가 온다. 세월이 비에 젖는다.
사월이 꽃을 꺾는다. 꽃이 꺾인다.
사월에 꿈을 꾼다. 새가 울고 세상이 저문다.
사월이 집을 짓는다. 잔월에 그림자가 길다.
사월이 사월에 사위고 사월에 불탄다.

그래

from text 2023/04/13 10:30
어려운 걸 하는 거지.
담배는 끊고 술은 줄이고.
취하거나 포만감 없이.
기억을 잃지 않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뜰히, 천천히.

* 백 근은 넘어야지 하던 몸무게가 어느새 백이십 근이 너끈하고, 폭음을 하지 않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술자리가 잦다. 몸에 안 맞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담배는 입에 대지 않은 지 삼십 개월째, 모난 성정에 정을 대듯 스스로 다짐을 새겨 둔다.

어떤 봄

from text 2023/03/23 14:45
비가 내린다. 아파트 단지가 둥둥, 만개한 벚꽃이 까르르. 다 잊었다는 듯, 밤을 지나고도 한참 더 올 모양이다. 흙내에 도시가 기우뚱. 이른 출근길, 어제 본 목련 꽃잎이 물 밖에 나온 금붕어처럼 아스팔트에 젖어 있었다. 등불처럼 환하던 것이 조금 뒤척이다가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비껴 선 라일락은 잎을 조금 더 내밀었고 매화는 제 소식을 다 전한 양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마음에는 봄이 내리고 어떤 마음에는 바람이 불었다. 궐련을 건네던 수줍은 얼굴, 우산살 끝에서는 어떤 봄이 무너져 내렸다. 비가 내리고, 세상의 끝으로 갈 것이 간다.

긴 여정에

from text 2023/02/16 20:50
지난 토요일, 거실과 방, 주방의 등기구들을 LED로 교체하였다. 오래 벼르기만 하다 마침 공동구매 행사가 있어 맞춘 것인데, 따로 구매한 전구색 식탁등이 꽤 마음에 든다. 사는 곳이 조금 더 밝고 단순해졌다. 긴 여정에 뭐 하나 잘 빼거나 더한 기분. 다음은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 한 대목. 나 같은 음치도 기꺼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글보다 그림이 더 좋았고, 어떤 마음이 고마웠다. 사는 것이 조금 더 애틋해졌다.

미술이나 문학은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악은 먼 우주에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좋은 멜로디는 다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천만에 아직도 온 우주에 무궁무진하다. 흘러넘친다.

또 봄이 오고

from text 2023/02/09 21:12
꽃이 피고 또 봄이 오고 저기 저쯤, 겨울을 살던 너는 가고 다른 네가 방긋 웃는다. 물이 오르고 막이 내린다. 또르륵 세상이 구르고 저기 저쯤, 모른 척 다시 네가 나타난다.

어떤 주정

from text 2023/01/17 18:18
맞아요, 인생은 슬픈 구석이 있어요. 네, 건배. 그래요, 소멸이 예정되어 있고 이별이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요, 살아있을 때에도 온전할 수 없고 만날 때에도 제대로 알거나 소통할 수 없지요. 그게 인생의 참맛이니 어쩌니 해도 슬픈 건 어쩔 수 없겠지요. 아무렴, 인생이 슬프거나 말거나 그게 뭔 대수일까요만. 네, 어제는, 그래요, 어쩌면 내일은, 달랐거나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말고요. 네, 한 병 더. 그렇지요, 그렇게 욕망을 소진하고, 흥미를 잃고, 약간의 강박과 약간의 관념에다 약간의 소신을 더하다 보면, 종착이지요. 일찍이 배운 바를 늦게까지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 아무렴요, 서글픈 일이고 말고요. 그래요, 건배. 그런데, 사는 게 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별 게 또 별 게 아니기도 하더란 말이지요. 다 놓아도 놓지 않는 그것도, 꼭 붙잡던 어떤 것도 다 놓을 때가 있더란 말이지요. 네, 위하여. 애정보다는 우정을, 사랑보다는 의리를. 그렇지요. 누가 말했던가요, 무엇으로부터 자유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도 좋지만 무슨 수로 자유인가 묻지 않을 수 없더란 말이지요. 좋지요, 한 병 더. 그럴 리가요, 해답이 사랑이거나 운명일 수는 없지요. 그렇고 말고요. 네, 그저 하나의 똥덩어리일 뿐이지요. 똥통을 헤쳐 나가는 우아한 똥덩어리, 필시 똥통을 이루고야 말 행복한 똥덩어리들일 뿐이지요. 그럼요.

언젠가 사월이면

from text 2023/01/12 18:05
폭포는 그 이름이 폭포요, 들에 핀 꽃은 그 자체가 들에 핀 꽃이다. 소한과 대한 사이 가는 햇살에도 산이 무너지고 멀쩡하던 연인이 헤어진다. 누구는 자빠지고 누구는 자빠진 김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염이 자라고부터 꼬박 일주일을 면도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이 겨울, 침묵을 두고 너도 멀리 가려느냐. 면역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 법, 문득 옛날이 그리워 송창식과 한영애의 목련을 반복하여 듣는다. '가만히 떠는 그 물'과 '늦가을 설운 정'을 생각하며 오래된 나무의 도수에 취한다. 바깥 세상에도 어느새 노을이 진다. '언젠가 사월이면' 너도 아름답게 물들일.

첫눈을 보며

from text 2022/12/22 14:10
첫눈이 온 날, 혁명 기념일에 기념탑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생각한다. 하얗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성냥불처럼 꺼졌어도 화약으로 타올랐던 이들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첫눈이 오면 만나기로 한 사람도 생각한다. 그 사람은 이미 까맣게 잊었거나 첫눈을 핑계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세월에 녹아 벌써 없어졌고 어쩌면 나처럼 장소와 사람이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그저 첫눈을 보며 가물가물 옛일을 생각한다. 시절이 좋아 어디서든 단 한 번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먼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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