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짧은 바람에 2024/02/17
  2. 흔들흔들 2024/01/15
  3. 따뜻한 겨울 2023/12/13
  4. 나중에 2023/12/07
  5. 앞산과 함께 2023/11/23
  6.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11/22
  7. 가을비에 부쳐 2023/11/16
  8. 가을이 가는 자리 2023/11/06
  9. 큰 나무에게 2023/10/24
  10. 다른 세상 2023/09/21
  11. 신천에서 2023/08/26
  12. 유두절 2023/08/02
  13. 즐거운 중독 2023/07/11
  14. 길 위에서 2023/06/18
  15. 덩굴장미 2023/05/19
  16. 철쭉 2023/04/24

짧은 바람에

from text 2024/02/17 16:42
겸손하고 염치를 알며 약간의 위악에 위트와 직관을 겸비하고 있다면 더불어 놀 만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배려하며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희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살다 보면 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해가 되기도 하고 해가 되던 것들이 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답이 되기도 하고 답이 되던 것들이 답이 되지 않기도 한다. 뻔한 정답이나 어려운 해답도, 이해나 손해도 다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 나지 않는 것이 절반, 쓰잘데기 없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구나. 이제 지난날은 그저 다 지나간 것일까. 지날 날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이제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산에 올라, 너를 생각하며 울었다. 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울고,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마저 울었다. 짧은 바람에, 마른 가지가 저 혼자 떨어졌다.

흔들흔들

from text 2024/01/15 22:05
인생이 늘 알 듯 모를 듯하더니 언젠가부터 어제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알 듯하던 것이 무언지도 영 모르겠다. 당최 현실감이 없고 이게 나인지 여기가 내가 사는 세상인지도 확실치 않을 때가 있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눈이 꽤 왔나 보다. 오를 때 멀리 드문드문 보이던 것이 하산길 응달에는 온통 하얗게 굳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뭘 좀 생각하다가는 변을 당하기 십상이겠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와 산 아래를 빙 돌았다. 어디든 바로 가기 싫어 더 멀리 돌았다. 지치면 주저앉을까. 앞발로 뒷발을 끌고 뒤꿈치로 땅을 밀었다. 가 버릇하면 또 간다고, 엎어질 듯이 자빠질 듯이 흔들흔들 걸었다. 그렇지. 늘 알 듯 모를 듯하던 것은 알든 모르든 별 게 아닌 거였다. 대저 내가 흔들거나 흔들린 것일 뿐.

따뜻한 겨울

from text 2023/12/13 20:06
정수를 두어야 한다. 얕은 수를 두거나 스스로 속여 봐야 헛일이다. 한 수 한 수 바르게 놓고 기다리는 것, 그게 정석이다. 채우기 전에 그릇을 키우듯 길게 보고 크게 보고 가야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생각보다 짧아도 길게 보고 가고, 그릇이 조막만 하여도 크게 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상 고온에 비도 봄비처럼 내리더니 교정 곳곳 목련마다 전구 같은 꽃망울이 맺혔다. 다시 비가 오고 추워진다니 어느 해 겨울처럼 피지 못하고 질 모양이다. 아마 그해 겨울처럼 가없는 우주 어딘가나 다른 우주 어디쯤에서 활짝 필 모양이다.

나중에

from text 2023/12/07 18:38
짧은 시간에 많은 경험을 하고 갑자기 확 늙어 버린, 기분 좋게 나이 든 이 느낌이 썩 낯설지 않다. 죽은 세포가 살아난 것처럼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감각이 비틀거리거나 꿈틀거렸다. 내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게 해 준 사람들이 있다. 그 덕에 세상의 이치와 허무에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속살도 보고 이면도 볼 수 있었다. 미련이나 회한이 없을 수 없겠지만 크게 아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볼 것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앞산과 함께

from text 2023/11/23 15:26
지난 몇 달, 한 주에 한두 번 꼴로 앞산(성불산으로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으며, 대체로 산성산과 대덕산을 아울러 일컫는다) 일대를 돌아다녔다. 정상으로 오르기도 하고 둘레를 걷기도 하고 적당히 섞기도 하면서. 낯설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들이 있다. 토굴암, 법장사, 은적사, 대덕사, 안일사 같은 절들과 잣나무숲, 만수정, 성불정, 평안동산 같은 곳, 그리고 고산골, 큰골, 안지랑골, 용두골, 달비골에 이르기까지. 가까이 이만한 데가 있어 계절도, 사람도, 나무와 돌도 예사롭지 않게 볼 수 있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다니다 보면 언제나 말이 없는 줄 알았던 것이 어떤 날은 세상의 비밀을 슬쩍 일러주기도 하고, 세월에 닳고 새 기억에 낡아 엔간히 무디어진 줄 알았던 어떤 것이 가슴 저 밑에서 시퍼렇게 날이 서 오기도 한다. 아무렴, 뜻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결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나고 보면 거기 문득 너와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rom text 2023/11/22 18:22
며칠 생각이 많았다. 술도 많이 먹고 오래 걷기도 하였다. 하릴없는 잡생각일 뿐이지만 여물지 않은 새가슴이 뻔한 핑계라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겪는 일이란 게 다 좋은 건 아니구나. 멈췄을 때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리는 이치인가. 오래 걷다 보면 문득 살고 싶어진다. 살고 있음에도 무언가 절박하게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유리알 같던 새가슴이 잠시 여물기도 하고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이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정처 없으나 영락없는 일이다. 근육을 더 길러야 하나. 모를 일이다.

가을비에 부쳐

from text 2023/11/16 20:50
그래, 몸에 안 맞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었다. 갈아입는 데에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걸릴 테지. 며칠 술에 심신이 약해진 건가. 작은 위로나 잠깐 헤아리는 몇 마디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이 울컥하곤 한다. 갈데없이 늙은 것, 부쩍 무엇을 사거나 어떤 결정을 내리고 바로 후회하는 일도 잦다. 못난 놈이 섣불리 제 경륜을 믿을 것이 아니라 정신줄이나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오후 들어 비가 내린다. 이번 가을비도 밖에만 내리는 게 아니구나. 뿌리를 내릴 것도 아니건만 젖은 속이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는다. 옛일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어째 노곤하니 하매 봄이 그립다.

가을이 가는 자리

from text 2023/11/06 18:45
십일월 저기는, 가을이 가는 자리로고. 울긋불긋 너는 열명길을, 물들 것 물들이고 가는구나. 산에 난 길은 모두 하산길, 유유자적 너를 따라 걷는다. 지난 인연이사 모를 일, 그예 산빛도 다하였구나. 어기야디야. 가는 가을에 온 산이 무너진다. 다시 오지 말자고, 그 자리에 함께 무너진다.

큰 나무에게

from text 2023/10/24 04:50
나는 세월을 다 보았노라.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거나 햇살이 일렁이는 것, 인간들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과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을. 도토리를 감추는 다람쥐도 다람쥐를 노리는 올빼미도 늘상 진지할 일은 아니었다. 이파리를 떨구는 무리도, 썩은 이파리에 알을 까던 풍뎅이도. 서로 잡아먹거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인간들도. 나는 다시 오는 세월과 다시 오지 않는 세월을 다 보았느니, 뿌리가 가지처럼 하늘에 닿고 가지가 뿌리처럼 세속에 닿았다. 두 손 모아, 合掌.

* 지난 14일 단체로 속리산 세조길에 다녀왔다. 나무와 길이 좋았고 수정암 아래 계곡이 좋았다. 속리에 감흥이 일어 뒤풀이 자리에서 건배사로 육행시를 읊었다. 속세를 떠났으나 떠나지 못한 자의 이야기로되 다시 보니 떠나지 않았으나 이미 떠난 자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속리산에 와 /리별한 여인을 생각하누나 /산은 언제나 말이 없건만 /세월만 야속하여라 /조용히 잔을 드노니 그대여 /길이길이 행복하시라

* 5년 5개월 이어 오던 물생활을 접었다. 아끼는 유목 두 점만 남기고 생물과 물품들을 모두 0124님 지인에게 넘겼다. 시원섭섭한 게 이런 기분이구나. 휑한 거실 탁자에 유목 두 점 올려 두었다.

다른 세상

from text 2023/09/21 20:26
다른 세상을 살란다. 나중 말고 지금, 저기 말고 여기서. 경계에서, 꽃을 흔드는 바람과 바람을 흔드는 꽃. 어허 나는야 다르게 살란다. 아무도 모르게, 달리 지고 달리 필란다. 그만 다른 세상에 살란다. 다른 세상, 다르게 살다 갈란다.

* 걷던 길 어디쯤 온통 노란 꽃들 틈에 주황으로 타오르는 꽃이 있었다. 나도 너를 따라 다른 세상에서 다른 세상이나 살란다 하고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오래 되뇌다 돌아왔다.

신천에서

from text 2023/08/26 09:02
누가 나를 대속할 수 있으며, 내가 누굴 대속할 수 있으랴. 내가 너를 정관할 때 물색 고운 너도 나를 정관하고 있었구나. 배롱나무 꽃잎이 내를 따라 나란하다. 저기 어디 산새가 날았던가. 전신이 따갑더니 가벼운 정신에 근육이 붙는다.

다 잊었으니 꿈에라도 울 일 없어라.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을 알 길이 없고, 내세와 윤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구나.

짧은 여름이 가고 이제 더 짧은 가을이 오겠지. 다른 계절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음 세상은 다음에 만들 터. 백로, 왜가리가 생각처럼 섰고 청둥오리가 졸졸졸 물소리를 따라간다. 코스모스와 루드베키아가 만발한 길에는 누가 버린 기억들이 있다.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과 꿈의 조각 같은 것들이 있다. 어제의 배롱나무 꽃들이 내를 따라 흐른다.

유두절

from text 2023/08/02 16:15
속죄하는 마음으로, 허나 결코 달게 받지 않겠다는 정신으로 걷고 또 걷는다. 상류를 향해 용두교에서 가창교에 이르는 길에는 이미 가을이 묻어 있다. 다른 세상인 듯 끄트머리 어디쯤에는 옛 마을의 정취도 있고 함께 뛰어노는 애들도 있다. 지구만 한 보름달이 당산나무에 걸렸구나. 어지럽고 고즈넉하여 잠시 멈춰 섰다 돌아서 다시 길을 걷는다. 지나온 길이 길이 아니구나, 내가 내가 아니구나 하다가 나도 따라 어디 다리 밑에 걸린다. 얼쑤, 굿춤 추듯 춤을 춘다.

즐거운 중독

from text 2023/07/11 10:40
늦기 전에 시작하여 다행이다. 어스름을 전후하여 길 잃은 노래를 부르고 순례자처럼 땀을 흘린다. 길이 없는 길을 걷는다. 어디든 길인 길을 걷는다. 꽃이 있고 물이 흐르고 어디든 나무가 자란다. 피가 돌고 시간이 거꾸로 간다. 가다 보면 네가 있고 너와 내가 떨어진 자리가 있다.

비 갠 후에는 잠자리 떼가 여럿 출몰하였고, 이끼 낀 돌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시작하였으니 늦지 않았다. 소멸이어도, 누구도 망가지지 않는 즐거운 중독이기를.

길 위에서

from text 2023/06/18 13:05
긴 꿈이었을까 저 아득한 세월이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
긴 꿈이었다면 덧없게도 잊힐까
대답 없는 길을 나 외롭게 걸어왔네
푸른 잎들 돋고 새들 노래를 하던
뜰에 오색 향기 어여쁜 시간은 지나고
고마웠어요 스쳐간 그 인연들
아름다웠던 추억에 웃으며 인사를 해야지
아직 나에게 시간이 남았다면
이 밤 외로운 술잔을 가득히 채우리

푸른 하늘 위로 웃음 날아오르고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
기억할게요 다정한 그 얼굴들
나를 떠나는 시간과 조용히 악수를 해야지
떠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면
이 밤 마지막 술잔에 입술을 맞추리
긴 꿈이었을까 어디만큼 왔는지
문을 열고 서니 찬 바람만 스쳐 가네
바람만 스쳐 가네​​

최백호의 길 위에서. 이주엽 작사, 김종익 작곡. 듣다 보면 볼륨을 자꾸 높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가히 긴 꿈보다 아득해지고 만다.

사는 모양에 조금 변화가 있으려나. 적게 먹고 자주 걷는다. 가끔 술을 마시고, 여전히 사람이 좋을 때도 있지만 엉망으로 취하지는 않는다. 유월 초에 거창 창포원을 구경하고 오일장에 들러 장을 보았으며, 며칠 전에는 안강 옥산서원에 다녀왔다. 거창에 들른 길에 오래 그리웠던 구구식당 어탕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기억은 풍화하기 마련, 신천과 고산골, 용두토성 일대가 이렇게나 좋았나 싶다. 얼른 다른 계절이 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시간이 더디 흘러 지금 모습을 더 자주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사는 모양에 조금 힘을 더하려 가볍게 입을 옷도 좀 사고 대략 백만 년 만에 모자와 운동화도 샀다. 버킷햇 스타일의 모자도 바다색 운동화도 마음에 든다. 그야 이미 다른 사람인데 나도 이미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덩굴장미

from text 2023/05/19 05:48
그림자가 없어 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자가 모자라
네 눈 밑 그늘을 훔쳐 그림자에 붙였다.
고운 주름이 그림자를 따라와
그림처럼 웃었다. 구분 없이
꿈처럼 웃었다. 흐린 꿈이 좋아
낮달도 불렀다. 줄지어
홍등이 그림자를 떨구었다.
떨어진 그림자는 떨어진 그림자를,
그림자는 그림자를,
너는 네 지난날을, 다시 장악했다.

철쭉

from text 2023/04/24 15:40
빛나는 청승도 저 세상도
피었으니 시들 일 있으리
윤이월 그믐에 꽃이사 피었겠건만
다 잊었겠건만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지 않겠느냐
드러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겠느냐
점점이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