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사계동행 2 2022/12/12
  2. 오늘, 문득 2022/11/27
  3. 산사를 떠나 2022/11/25
  4. 만추 2022/11/13
  5. 단풍 2022/11/10
  6. 병 속의 새 2022/11/02
  7. 아버지의 역사 2022/10/29
  8. 남루한 흔적들 2022/10/25
  9. 나비가 나풀나풀 2022/10/22
  10. 가을은 짧고 2022/10/11
  11. 성주호 2022/10/02
  12. 봉덕경 2022/09/14
  13. 한 소식 2022/09/04
  14. 비 오는 날 2022/08/29
  15. 이제 우리는 2022/07/26
  16. 세상에는 2022/07/12

사계동행

from text 2022/12/12 08:25
사계동행 친구들과 토, 일 거제도에 다녀왔다. 이 모임에서 식구들 빼고 일박으로 어디 다녀온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남다른 감회들이 있었다. 덕포해수욕장에 있는 한 친구의 옛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조개찜과 구이를 안주로 술을 잔뜩 먹고 노래방에 가 노래도 불렀다. 아침은 인근에서 굴국밥, 점심은 돌아오는 길에 밀양 유천본동식당에서 잡어추어탕을 먹었다. 역사가 있는 집인 모양인데 우거지를 넣고 잡어로 추어탕처럼 끓여 낸 게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오가며 해저터널과 거가대교, 짙푸른 바다가 인상에 남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든 오랜 친구들과 대화가 좋았다. 사계동행은 만나고 나면 늘 배우고 조금 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연이 여기에 이른 것에 감사한다. 누구의 건배사처럼 육십에도 무사히 보기를. 여전하기를.
Tag //

오늘, 문득

from text 2022/11/27 10:55
어릴 적 눈물의 고향이 그래도 생각해 보면 한 번쯤 날 미소 짓게 한 추억은 있을 거야
세상을 향해 나올 때 난 누굴 의지했나 땅거미 진 창가 별 하나 보여주던 그도 이미 떠난 사랑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이 세상은 보이는 곳 아니야 괴로워 말기 원망도 말기 아름다운 세상만 보기

세상을 향해 나가봐 넌 나를 의지하니 세월 빠르게 지나 우리의 마지막 남아있는 사랑까지
세상 다 아니고 멀지도 않은 너 하나 용서 못하겠니 외로워 않기 슬퍼도 않기 미웠었던 기억도 않기
오래전 그날처럼 초록 나무 이름 모를 꽃 하늘 구름 바람 눈부신 햇빛까지도 사로잡은 오후의 평화
눈물도 놓고 추억도 놓고 사랑했던 사람도 놓고

그래, 올겨울은 이 노래다. 2007년 발표한 심수봉의 11집 타이틀곡 오늘, 문득.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산사를 떠나

from text 2022/11/25 18:52
늙은 목어가 간다. 법당 건너 재 너머, 여기서 저기로. 지치면 잠이 단 법, 오래 지치면 영원한 수면도 두렵지 않겠구나. 그리움에 지치면 영영 잊기도 한다니, 긴 꿈에서 깨어 긴 잠에 들면 꿈이 무어고 잠이 다 무어랴. 찬바람 한 번에 간밤의 국화도 색이 바랬다. 절간 돌절구에 살얼음이 끼고 운판은 저 혼자 울었다. 덧없이 가노라만 어찌 너나 나만의 일이랴. 모퉁이마다 마른 물고기가 걸렸다. 빈속에 마른잎을 채웠다. 돌아갈 길 없구나. 법고와 범종이 따라 울었다. 마른풀에 꽃이 피고 산새가 날았다. 너와 누운 자리였나, 먼일처럼 눈발이 날린다.

만추

from text 2022/11/13 07:45
토요일 저녁, 늦가을의 길거리는 온통 낙엽이었다. 상가들은 불만 밝혔고 아무도 없었다. 이천동과 봉덕동의 경계, 바람도 없이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11월 중순에 이렇게 포근한 날이 있었나. 많은 잎을 단 나무들이 많은 잎을 떨어뜨렸고 떨어진 잎들이 눈처럼 쌓였다. 한 쌍의 새가 버즘나무 이파리를 피해 노란 무덤으로 날아들었다. 부리를 비비며 인연이란 게 있을까,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는 멀리 날아가려마. 나는 무덤을 파헤치듯 길을 내 새를 쫓았다. 기다리는 이에게 기다리지 말라 일렀다.

* 더러 서너 잔을 먹은 때가 없지는 않다만, 어쩌다 한두 잔만 먹겠다는 결심을 잘 지키고 있다. 그런대로 오래오래 갈 수도 있겠다. 식구야 논외로 하고, 늘 그렇듯 조금의 일탈이야 없으랴만.

단풍

from text 2022/11/10 18:08
세상 나무들이 단풍에 든다. 지난봄 새로 잎이 나올 때처럼 서럽지는 않다.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의 마음이 다를까. 이별이 예정되어 있어도 제가끔 할 일을 한다. 엽록소도 안토시아닌과 카로틴도 제 몫을 다했다. 수면을 일렁이는 바람의 양에 따라 거기 사는 물고기의 양이 정해진다지. 신진대사의 절정이어라. 바람이 불고, 단풍이 든다.

병 속의 새

from text 2022/11/02 21:06
인간이 존엄할까, 인간은 존엄한가 묻는다면
존엄한 인간이 있고,
존엄할 때나 존엄한 때가 있다고 답할밖에.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니
참으로 덧없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병 속의 새는
병 속이 딱 세상의 전부가 아닌가 되물을밖에.

아버지의 역사

from text 2022/10/29 01:02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따뜻함과 해학이 있다. 남도 사투리의 정겨움 속에 어쩐지 슬픔과 아픔이 있으며, 물 흐르듯 읽히는 중에 저도 모르게 웃고 울게 된다. 웃으며 울거나 울면서 웃게 된다. 사람의 도리와, 사람이 무어며 사람이 산다는 게 무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글을 쓰겠다는 허망을 한때 치기로 알고 진작에 그만두기를 얼마나 잘했나 싶다. 어쩐지 마음이 시린 작중 한 대목.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어 물며 돌아오던 신작로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산들거렸다.

읽으면서 우일문의 시시한 역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았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역사가 될 오늘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내일이라고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진짜는 드문 법이다. 밤이 깊다. 자꾸 뭔가를 놓고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남루한 흔적들

from text 2022/10/25 18:48
고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한 아버지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 옷가지며 책, 노트, 소지품들을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 뒤늦게 어머니가 교과서 서너 권을 겨우 건졌다. 그날따라 이상한 살기 같은 걸 느끼고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 나는 골목길에서 기름통을 들고 오던 아버지를 보고 그대로 뛰어 달아나 나중에야 불탄 사실을 알았다. 그길로 친구놈 손에 끌려 마지못해 다시 집과 학교에 돌아오기까지 오십 일을 넘게 밖에서 생활하였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카드, 여러 습작물과 기록이 있는 노트, 각종 유인물들을 후미진 캠퍼스 한 곳에서 몽땅 태웠다. 당시로서는 잡힐 것을 각오하고 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불탄 것에도 무어 대단한 것이야 있었겠냐마는 역시 훗날 아쉽고 그리울 때가 많았다.

며칠 전 무얼 좀 뒤지다가 1992년 5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쓴 일기를 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나마 잠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줄기차게 술을 마신 일과 함께 비루하고 가련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독서의 흔적과 보아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오래 잊고 있던 서울과 부천에서의 생활, 좌골신경통, 잠시 취업한 동해프로테인, 성주 초전에서의 노가다, 제록스 영업, 이츠야미, 다시 학교를 다닌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그 사람들과 그 세계, 어쩐지 작고 여린 나를 볼 수 있었다.

술과 사람들에 얽힌 남루한 흔적들, 가끔 이 블로그의 지난 글들을 보며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래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어쩌면 나는 한때 다른 말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만.

나비가 나풀나풀

from text 2022/10/22 17:18
간혹 한두 잔만 먹고 더는, 적어도 한 백여 일은 술을 퍼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사나흘, 굳게 결심하고 굳게 실행하고자 애를 써서 그렇겠지, 벌써 백 일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몸도 한참 술이라곤 안 마신 것처럼 가볍고 정신도 가을 하늘처럼 드높고 맑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까. 서른을 갓 지났을 어머니와 굽이진 이십여 리 고갯길을 걸은 적이 있다.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이었을 것이다. 힘이 들어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쉴 때 나비 두어 마리가 나풀나풀 앞서 날아갔다. 혼자 속으로 좀 태워 주거나 등 좀 떠밀어 주지 그랬던가, 어머니는 신을 벗어 손에 들고 내처 걸었다. 외가 아랫마을 한 집에서 물을 얻어먹으며 보았던 스텐 세숫대야에 헤엄치던 자라는 이상하리만치 생생한데, 이후 기억이 없다.

가을이 한창이니, 가을도 다 갔다. 책을 산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노태맹의 시집 이팝나무 가지마다 흰 새들이. 산문집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태맹이형은 정말 잘 늙어가고 있구나. 다음은 시집 뒤에 실린 시인의 산문 레퀴엠, 천사의 시학만은 아닌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단락과 맨 마지막 문단. 시집은 전체가 하나의 레퀴엠이요, 하나의 커다란 시였다.

빛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물속을 밝게 할 수는 없다. 물이 밝아지는 것은 물들이 맨살 전체로 햇살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빛의 무한 거리를 물이 꺾어 주면서, 그리하여 빛이 무한에서 유한에로의 꺾임을 통해 반짝임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사물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그 무한을 유한의 몸으로 견딤으로써 빛을 드러낸다. 생이 죽음을 견뎌내고 받아들임으로써 빛나는 것처럼. 무한은 유한에 종속된다. 이제 무한의 빛은 유한한 우리의 것이 된다. 시는 이 물과 같다. 그러나 나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로 한정 짓고 자기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한의 빛이 유한의 물 표면에 부딪힐 때의 그 섬광을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아름다운 붉음은 늘 나타나고 있는 상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라짐이 자주 더 아름다운 붉은빛을 띠기도 한다. 사라지는 모든 이들이, 그리고 나도,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가을은 짧고

from text 2022/10/11 14:25
겨울은 길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돌이키지 않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은 돌아가지 않는다. 가을은 짧다. 구린 열매를 먼저 떨어뜨리고 색을 조금 바꾼 나무는 번식이나 증식에 관심이 없고, 바람에 질린 꽃들은 바람 따라 바람처럼 나부낀다. 해가 진다. 남에서 북으로 신천을 따라 걷다 희망교를 건너 어디 면 소재지에서나 볼 법한 술집으로 들어선다. 삼겹살과 돼지찌개를 팔고 밥값은 따로 받지 않는다. 멸치 우린 된장찌개도, 잘 익은 김치와 방금 무친 콩나물이나 신선한 푸성귀도 다 거저다. 달무리가 진다. 갱도에서는 불을 꺼야 빛이 보인다고 한다. 글쎄, 다 같이 불을 끌 수 있을까. 저기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하나둘 불을 끄고 있는 것일까. 가을은 짧고, 갈 길이 멀다.

성주호

from text 2022/10/02 19:02
성주호 둘레는 오르내리는 길이 많았다. 부교 주위에는 새끼 물고기가 가득하였고 곳곳에 젊은 낚시꾼이 있었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미늘 없는 바늘이 떨어졌다. 무심한 파문은 건너편에 닿았고, 그늘진 맥문동 밭은 온통 까만 열매들로 반짝였다. 더운 햇볕과 서늘한 바람이 들고 나며 임무를 교대하고 있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 다녀온 게 얼마만인가. 잘 따라온 둘째 녀석, 먼 길 운전한 0124님이 고맙다. 길을 나설 때부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였다. 연휴 가운데 일요일, 한중망이어도 망중한일런가.

봉덕경

from text 2022/09/14 13:20
-- 鳳德의 모든 것은 원래 있었으나 원래 없었던 것이다. 나고 죽는 것도 이와 같다.
-- 바르게, 천천히 갈 일이다. 무엇이 바른 것이냐. 바르지 않은 것이 바른 것이다.
-- 봉덕에도 사계절이 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눈도 내린다. 달이 뜨고 해가 진다. 꽃이 피고 그늘이 진다.
-- 봉덕에는 늘 적당한 취기와 그만한 광기가 있다. 온전한 것은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 병들고 아픈 것이 병들지 않고 아프지 않은 것을 지배한다. 병들지 않고 아프지 않은 것은 병들고 아픈 것을 두려워한다.
-- 노래와 이주는 허용되지 않는다. 다섯을 처형하면 다섯이 태어난다.
-- 흐르거나 고이되 차거나 넘치지 않는다.
-- 누구에게나 음주는 허용되나 누구에게도 음주를 권할 수는 없다. 다섯이 태어나면 다섯이 죽는다. 예외는 없으며 예외 없는 것은 없다.
-- 보고 싶은 것은 볼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은 갈 수 있다.
--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볼 수 없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은 갈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할 수 없다.
-- 누구도 봉덕에서 길을 잃으면 두 번 길을 찾지 않는다. 봉덕이 길이요, 길을 잃은 자가 봉덕이기 때문이다.
-- 왔던 데로 가는 일은 없다. 임박한 일이란 이미 날 샌 일이요, 모두가 가꾸되 거두지 않는 청춘일 뿐이다.
-- 생산을 하지 않으니 새로운 질서 따위는 없다. 가끔 달이 지지 않고 해가 뜨지 않는다. 먼 땅이 다섯 번 흔들린다.
-- 예를 갖추어 서로 죽이고 서로 죽여 예를 갖춘다. 봉덕의 끝은 다른 봉덕이다. 다른 봉덕은 다시 봉덕이며 원래 있었으나 원래 없었던 것이다.
-- 아무는 일이 없고 아물지 않는 일이 없다. 변하는 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일이 없다.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 능히 두 발을 뻗는다. 合掌.

한 소식

from text 2022/09/04 07:08
비극은 끝이 났다. 전말이 드러났고 세상은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누군들 한때 찌질하지 않았겠는가. 미래는 가고 있고 현재는 오고 있으며 과거는 과거끼리 충돌한다. 어떤 기억은 바뀌고 어떤 기억은 잃어버린다. 시간은 빠르거나 느리고, 칠엽수 열매에는 억겁의 시간이 있다. 제라늄과 선인장, 꽃치자, 킨기아눔에도, 호야, 개운죽과 달팽이, 물고기, 고양이에도. 가까워서 이리 먼 것인가, 멀어서 이리 가까운 것인가. 한 소식 듣는 일이 다른 우주 이야기 마냥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어마어마한 태풍이 온다는데 누운 자리마다 꽃이 피기를. 일찍 온 가을이 마저 거두어 주기를.

비 오는 날

from text 2022/08/29 19:47
비 오는 날 너를 한입 베어 물면 어쩌다 복숭아나 자두 한쪽에서 느꼈던 벌레 덜 먹은 맛 같은 것이 난다. 쪼로롱 산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초록 위 배롱나무 붉은 꽃이 나를 맞던 새색시 같다. 며칠 전 꿈에서는 난생처음 대여섯 살 난 딸을 만났다. 보고싶었더냐 묻는 말에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손을 잡고 오래 걷기도 했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깨고 나서도 한 이틀은 실제 같았다. 비 오는 날 산을 한입 베어 물면 벌레 덜 먹은 것 같은 맛이 난다. 빗방울에 반짝이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오래 못 만난 내 딸만 같다.

* 배롱나무 꽃이 지면 가을도 더는 갈 길 없겠다. 남은 여름이사 숨을 곳 모르랴. 몇 번이나 남았을까. 기약 없이,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from text 2022/07/26 12:41
이제 나는 이게 별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런 나이가 되었고 그럴 나이가 되었다.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설령 일어나도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른다. 별 게 아닌 것이 별 게 아닌 게 아니었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애당초 별 게 아닌 게 아닌 일은 없었다.

한창 술이 좋을 때는 숙취도 좋았다. 이제 술이 별 게 아닌 지경에 이르니 숙취가 별 게 아닌 지경에 이르지 못한 조홧속이 새삼스럽다.

여름이 가고 있다. 나중 일이라 여기지 마라. 이제 너를 아쉽지 않게 배웅하고 종내 기꺼이 마중할 참이다.

세상에는

from text 2022/07/12 11:11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이미 어디 망가져 버린 걸까. 몸을 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하거나 지칠만큼 지칠 때면 안다. 세상에는 가소롭지 않은 일이 없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없다. 여름 신명도 있을까. 모르면 없는 것과 진배없으니 여기 물정이 이리 어리석다.

다음은 장자 제물론편에 나오는 장오자의 말 중 일부. '내 어찌 삶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미혹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나 돌아갈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그리고 인간세편에서 공자의 말 한 대목. '걸음을 멈추고 가지 않는 것은 쉽지만 걸어가면서 땅을 건드리지 않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