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어떤 세계 2024/07/17
  2. 늙은호박 2024/07/08
  3. 낙화 2024/06/26
  4. 언제나 2024/06/09
  5. 잔을 비우며 2024/05/02
  6. 사월을 보내며 2024/04/30
  7. 어떤 무대 2024/04/10
  8. 걸어라 2024/02/29
  9. 짧은 바람에 2024/02/17
  10. 흔들흔들 2024/01/15
  11. 따뜻한 겨울 2023/12/13
  12. 나중에 2023/12/07
  13. 앞산과 함께 2023/11/23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11/22
  15. 가을비에 부쳐 2023/11/16
  16. 가을이 가는 자리 2023/11/06

어떤 세계

from text 2024/07/17 19:28
지난 삶을 생각하니 기억의 총량을 벗어날 수 없구나. 남은 기억이 지난 삶의 전부로다. 언젠가부터 더해지는 기억은 없고 잊혀지거나 지워지는 기억만 있다. 용서해 다오. 모자란 놈이 모질진 않았으나 미덥지도 않았겠다. 며칠 전에 보니 배롱나무 꽃이 피었더라. 죽으면 새로운 세계로 드니 설렌다는 사람도 있다더만. 모를 일이다.

근래 만년필로 글씨 쓰는 재미에 빠져 있다. 내가 가졌거나 가진 가장 격렬한 취미라면 걷기나 등산이겠고, 매양 잔잔한 재미에만 빠졌거나 빠져 있는데 고요한 것 하나 더하게 되었다. 우선 구입한 건 펠리칸 M215 F닙과 4001 블루 블랙 잉크, 클레르퐁텐, 미도리, 로디아 노트와 밀크 프리미엄 복사용지, 그리고 펜코 클립보드. 반야심경과 몇 편의 시, 도덕경과 장자의 어떤 구절들, 그리고 읽고 있는 책과 블로그에 인용하거나 끄적인 글들의 일부를 필사하였고, 글을 쓰는 이상의 매력에 빠졌다. 사각거리며 미끄러지고 맺혔다 마르는, 펜과 잉크와 종이의 변주, 그 세계에.

올 장마는 유독 길고 자주 많은 비를 뿌리는구나. 살아갈 뿐 기억하지 못하는 중생에게 기어이 기억의 습한 길을 안내하는 듯이.

늙은호박

from text 2024/07/08 21:02
지난해 구월 금호에서 얻은 한아름짜리 늙은호박, 있는 듯 없는 듯 주방 한 구석에서 오래 묵었다. 아무래도 상했지,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사 잘라본다. 상하긴 개뿔. 주황색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단한 두께 안이 불을 켠 듯 환하다. 노을보다 붉게 빛난다. 전도 부치고 범벅도 만들어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구수한 늙은 맛이 난다. 너처럼, 안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두께를 가져야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활활 타오르는 속을 갖고, 한결같이 잘 여물어야겠다. 속이 더 붉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낙화

from text 2024/06/26 19:46
추억이 서린 음악은 얼마나 위험한가. 나이가 들어도 마르지 않는 심장, 바닥으로 꺼지거나 허공으로 사라질 아득함이여. 한잔의 술은 얼마나 불온한가. 거짓 위안과 환상으로, 가는 이를 배웅하는구나. 저 꽃잎은 얼마나 위태한가. 다음 계절이 와도 다시 돋을 줄 모른다. 부질없는 낭만과 뜻한 바 비겁으로 일관한 생애, 비와 마지막 바람을 불러 치명을 완수한다.

언제나

from text 2024/06/09 13:40
그래, 언제나 때를 기다렸지. 과거로 가거나 미래를 추억하고, 길을 접어 주머니에 넣을 적이나, 문득 누군가를 만나고, 흐리거나 비가 내리고, 헤매다 다시 길을 낼 적에도. 때가 되면 알지. 멱살 잡은 건 언제나 내가 아니라 때라는 걸. 그래, 너도 오래 기다렸구나. 먼저 움직이지 않는 세월처럼, 언제나 그렇게.

길을 걷다 보았다. 거기 있던 너. 지나지 않은 지난날.

잔을 비우며

from text 2024/05/02 23:18
두 병에서 세 병으로 가는 그 어디쯤
두고 온 사랑이 있을까
까무룩 잃어버린 꿈이 있을까
그 어디쯤
어린 날 그 어디쯤 가는 길이 있을까

사월을 보내며

from text 2024/04/30 01:14
사월을 보내며
사월에 보낸 그 사람을 생각한다
청춘의 몇 년을
나와 함께 보낸 사람
사월을 보내며
함께 사월을 보낸 그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무대

from text 2024/04/10 16:20
막이 오르면, (배경)눈 덮인 산하. (배경 음악)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1곡 안녕히 /Gute Nacht, 바리톤. (잠시 후, 독백)누구나 가야 하는 길, 인생은 슬픈 것이로구나. (억겁의 길을 걷는 나그네, 이어지는 독백)잘 있으라, 모두들. (노래 소리 높아지다 곧 암전)침묵 후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나그네는 사라지고, 눈 덮인 산하에 내리는 눈. (배경 음악)20곡 이정표 /Der Wegweiser에 이어 24곡 거리의 악사 /Der Leiermann. (독백)인생은 슬픈 것이로구나, 누구나 가야 하는 길. (천천히 막이 내리며, 이어지는 독백)그대, 잘 가오.

걸어라

from text 2024/02/29 05:16
울적하거든 걸어라
삶이 속이는 것 같거나
세월이 야속하여도
산길이든 들길이든
꿈길이든
살 만하거든 걸어라
딱 죽고만 싶거나
대개 부질없어도
인연이야 모를 일
저 세상 일일랑 잊고
다시 걸어라

짧은 바람에

from text 2024/02/17 16:42
겸손하고 염치를 알며 약간의 위악에 위트와 직관을 겸비하고 있다면 더불어 놀 만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배려하며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희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살다 보면 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해가 되기도 하고 해가 되던 것들이 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답이 되기도 하고 답이 되던 것들이 답이 되지 않기도 한다. 뻔한 정답이나 어려운 해답도, 이해나 손해도 다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 나지 않는 것이 절반, 쓰잘데기 없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구나. 이제 지난날은 그저 다 지나간 것일까. 지날 날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이제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산에 올라, 너를 생각하며 울었다. 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울고,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마저 울었다. 짧은 바람에, 마른 가지가 저 혼자 떨어졌다.

흔들흔들

from text 2024/01/15 22:05
인생이 늘 알 듯 모를 듯하더니 언젠가부터 어제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알 듯하던 것이 무언지도 영 모르겠다. 당최 현실감이 없고 이게 나인지 여기가 내가 사는 세상인지도 확실치 않을 때가 있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눈이 꽤 왔나 보다. 오를 때 멀리 드문드문 보이던 것이 하산길 응달에는 온통 하얗게 굳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뭘 좀 생각하다가는 변을 당하기 십상이겠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와 산 아래를 빙 돌았다. 어디든 바로 가기 싫어 더 멀리 돌았다. 지치면 주저앉을까. 앞발로 뒷발을 끌고 뒤꿈치로 땅을 밀었다. 가 버릇하면 또 간다고, 엎어질 듯이 자빠질 듯이 흔들흔들 걸었다. 그렇지. 늘 알 듯 모를 듯하던 것은 알든 모르든 별 게 아닌 거였다. 대저 내가 흔들거나 흔들린 것일 뿐.

따뜻한 겨울

from text 2023/12/13 20:06
정수를 두어야 한다. 얕은 수를 두거나 스스로 속여 봐야 헛일이다. 한 수 한 수 바르게 놓고 기다리는 것, 그게 정석이다. 채우기 전에 그릇을 키우듯 길게 보고 크게 보고 가야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생각보다 짧아도 길게 보고 가고, 그릇이 조막만 하여도 크게 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상 고온에 비도 봄비처럼 내리더니 교정 곳곳 목련마다 전구 같은 꽃망울이 맺혔다. 다시 비가 오고 추워진다니 어느 해 겨울처럼 피지 못하고 질 모양이다. 아마 그해 겨울처럼 가없는 우주 어딘가나 다른 우주 어디쯤에서 활짝 필 모양이다.

나중에

from text 2023/12/07 18:38
짧은 시간에 많은 경험을 하고 갑자기 확 늙어 버린, 기분 좋게 나이 든 이 느낌이 썩 낯설지 않다. 죽은 세포가 살아난 것처럼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감각이 비틀거리거나 꿈틀거렸다. 내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게 해 준 사람들이 있다. 그 덕에 세상의 이치와 허무에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속살도 보고 이면도 볼 수 있었다. 미련이나 회한이 없을 수 없겠지만 크게 아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볼 것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앞산과 함께

from text 2023/11/23 15:26
지난 몇 달, 한 주에 한두 번 꼴로 앞산(성불산으로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으며, 대체로 산성산과 대덕산을 아울러 일컫는다) 일대를 돌아다녔다. 정상으로 오르기도 하고 둘레를 걷기도 하고 적당히 섞기도 하면서. 낯설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들이 있다. 토굴암, 법장사, 은적사, 대덕사, 안일사 같은 절들과 잣나무숲, 만수정, 성불정, 평안동산 같은 곳, 그리고 고산골, 큰골, 안지랑골, 용두골, 달비골에 이르기까지. 가까이 이만한 데가 있어 계절도, 사람도, 나무와 돌도 예사롭지 않게 볼 수 있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다니다 보면 언제나 말이 없는 줄 알았던 것이 어떤 날은 세상의 비밀을 슬쩍 일러주기도 하고, 세월에 닳고 새 기억에 낡아 엔간히 무디어진 줄 알았던 어떤 것이 가슴 저 밑에서 시퍼렇게 날이 서 오기도 한다. 아무렴, 뜻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결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나고 보면 거기 문득 너와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rom text 2023/11/22 18:22
며칠 생각이 많았다. 술도 많이 먹고 오래 걷기도 하였다. 하릴없는 잡생각일 뿐이지만 여물지 않은 새가슴이 뻔한 핑계라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겪는 일이란 게 다 좋은 건 아니구나. 멈췄을 때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리는 이치인가. 오래 걷다 보면 문득 살고 싶어진다. 살고 있음에도 무언가 절박하게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유리알 같던 새가슴이 잠시 여물기도 하고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이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정처 없으나 영락없는 일이다. 근육을 더 길러야 하나. 모를 일이다.

가을비에 부쳐

from text 2023/11/16 20:50
그래, 몸에 안 맞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었다. 갈아입는 데에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걸릴 테지. 며칠 술에 심신이 약해진 건가. 작은 위로나 잠깐 헤아리는 몇 마디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이 울컥하곤 한다. 갈데없이 늙은 것, 부쩍 무엇을 사거나 어떤 결정을 내리고 바로 후회하는 일도 잦다. 못난 놈이 섣불리 제 경륜을 믿을 것이 아니라 정신줄이나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오후 들어 비가 내린다. 이번 가을비도 밖에만 내리는 게 아니구나. 뿌리를 내릴 것도 아니건만 젖은 속이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는다. 옛일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어째 노곤하니 하매 봄이 그립다.

가을이 가는 자리

from text 2023/11/06 18:45
십일월 저기는, 가을이 가는 자리로고. 울긋불긋 너는 열명길을, 물들 것 물들이고 가는구나. 산에 난 길은 모두 하산길, 유유자적 너를 따라 걷는다. 지난 인연이사 모를 일, 그예 산빛도 다하였구나. 어기야디야. 가는 가을에 온 산이 무너진다. 다시 오지 말자고, 그 자리에 함께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