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사월 2023/04/14
  2. 그래 2023/04/13
  3. 어떤 봄 2023/03/23
  4. 긴 여정에 2023/02/16
  5. 또 봄이 오고 2023/02/09
  6. 어떤 주정 2023/01/17
  7. 언젠가 사월이면 2023/01/12
  8. 첫눈을 보며 2 2022/12/22
  9. 사계동행 2 2022/12/12
  10. 오늘, 문득 2022/11/27
  11. 산사를 떠나 2022/11/25
  12. 만추 2022/11/13
  13. 단풍 2022/11/10
  14. 병 속의 새 2022/11/02
  15. 아버지의 역사 2022/10/29
  16. 남루한 흔적들 2022/10/25

사월

from text 2023/04/14 20:38
사월이 길을 나선다. 길이 벌떡 일어난다.
사월에 비가 온다. 세월이 비에 젖는다.
사월이 꽃을 꺾는다. 꽃이 꺾인다.
사월에 꿈을 꾼다. 새가 울고 세상이 저문다.
사월이 집을 짓는다. 잔월에 그림자가 길다.
사월이 사월에 사위고 사월에 불탄다.

그래

from text 2023/04/13 10:30
어려운 걸 하는 거지.
담배는 끊고 술은 줄이고.
취하거나 포만감 없이.
기억을 잃지 않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뜰히, 천천히.

* 백 근은 넘어야지 하던 몸무게가 어느새 백이십 근이 너끈하고, 폭음을 하지 않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술자리가 잦다. 몸에 안 맞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담배는 입에 대지 않은 지 삼십 개월째, 모난 성정에 정을 대듯 스스로 다짐을 새겨 둔다.

어떤 봄

from text 2023/03/23 14:45
비가 내린다. 아파트 단지가 둥둥, 만개한 벚꽃이 까르르. 다 잊었다는 듯, 밤을 지나고도 한참 더 올 모양이다. 흙내에 도시가 기우뚱. 이른 출근길, 어제 본 목련 꽃잎이 물 밖에 나온 금붕어처럼 아스팔트에 젖어 있었다. 등불처럼 환하던 것이 조금 뒤척이다가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비껴 선 라일락은 잎을 조금 더 내밀었고 매화는 제 소식을 다 전한 양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마음에는 봄이 내리고 어떤 마음에는 바람이 불었다. 궐련을 건네던 수줍은 얼굴, 우산살 끝에서는 어떤 봄이 무너져 내렸다. 비가 내리고, 세상의 끝으로 갈 것이 간다.

긴 여정에

from text 2023/02/16 20:50
지난 토요일, 거실과 방, 주방의 등기구들을 LED로 교체하였다. 오래 벼르기만 하다 마침 공동구매 행사가 있어 맞춘 것인데, 따로 구매한 전구색 식탁등이 꽤 마음에 든다. 사는 곳이 조금 더 밝고 단순해졌다. 긴 여정에 뭐 하나 잘 빼거나 더한 기분. 다음은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 한 대목. 나 같은 음치도 기꺼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글보다 그림이 더 좋았고, 어떤 마음이 고마웠다. 사는 것이 조금 더 애틋해졌다.

미술이나 문학은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악은 먼 우주에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좋은 멜로디는 다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천만에 아직도 온 우주에 무궁무진하다. 흘러넘친다.

또 봄이 오고

from text 2023/02/09 21:12
꽃이 피고 또 봄이 오고 저기 저쯤, 겨울을 살던 너는 가고 다른 네가 방긋 웃는다. 물이 오르고 막이 내린다. 또르륵 세상이 구르고 저기 저쯤, 모른 척 다시 네가 나타난다.

어떤 주정

from text 2023/01/17 18:18
맞아요, 인생은 슬픈 구석이 있어요. 네, 건배. 그래요, 소멸이 예정되어 있고 이별이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요, 살아있을 때에도 온전할 수 없고 만날 때에도 제대로 알거나 소통할 수 없지요. 그게 인생의 참맛이니 어쩌니 해도 슬픈 건 어쩔 수 없겠지요. 아무렴, 인생이 슬프거나 말거나 그게 뭔 대수일까요만. 네, 어제는, 그래요, 어쩌면 내일은, 달랐거나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말고요. 네, 한 병 더. 그렇지요, 그렇게 욕망을 소진하고, 흥미를 잃고, 약간의 강박과 약간의 관념에다 약간의 소신을 더하다 보면, 종착이지요. 일찍이 배운 바를 늦게까지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 아무렴요, 서글픈 일이고 말고요. 그래요, 건배. 그런데, 사는 게 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별 게 또 별 게 아니기도 하더란 말이지요. 다 놓아도 놓지 않는 그것도, 꼭 붙잡던 어떤 것도 다 놓을 때가 있더란 말이지요. 네, 위하여. 애정보다는 우정을, 사랑보다는 의리를. 그렇지요. 누가 말했던가요, 무엇으로부터 자유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도 좋지만 무슨 수로 자유인가 묻지 않을 수 없더란 말이지요. 좋지요, 한 병 더. 그럴 리가요, 해답이 사랑이거나 운명일 수는 없지요. 그렇고 말고요. 네, 그저 하나의 똥덩어리일 뿐이지요. 똥통을 헤쳐 나가는 우아한 똥덩어리, 필시 똥통을 이루고야 말 행복한 똥덩어리들일 뿐이지요. 그럼요.

언젠가 사월이면

from text 2023/01/12 18:05
폭포는 그 이름이 폭포요, 들에 핀 꽃은 그 자체가 들에 핀 꽃이다. 소한과 대한 사이 가는 햇살에도 산이 무너지고 멀쩡하던 연인이 헤어진다. 누구는 자빠지고 누구는 자빠진 김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염이 자라고부터 꼬박 일주일을 면도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이 겨울, 침묵을 두고 너도 멀리 가려느냐. 면역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 법, 문득 옛날이 그리워 송창식과 한영애의 목련을 반복하여 듣는다. '가만히 떠는 그 물'과 '늦가을 설운 정'을 생각하며 오래된 나무의 도수에 취한다. 바깥 세상에도 어느새 노을이 진다. '언젠가 사월이면' 너도 아름답게 물들일.

첫눈을 보며

from text 2022/12/22 14:10
첫눈이 온 날, 혁명 기념일에 기념탑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생각한다. 하얗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성냥불처럼 꺼졌어도 화약으로 타올랐던 이들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첫눈이 오면 만나기로 한 사람도 생각한다. 그 사람은 이미 까맣게 잊었거나 첫눈을 핑계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세월에 녹아 벌써 없어졌고 어쩌면 나처럼 장소와 사람이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그저 첫눈을 보며 가물가물 옛일을 생각한다. 시절이 좋아 어디서든 단 한 번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먼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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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동행

from text 2022/12/12 08:25
사계동행 친구들과 토, 일 거제도에 다녀왔다. 이 모임에서 식구들 빼고 일박으로 어디 다녀온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남다른 감회들이 있었다. 덕포해수욕장에 있는 한 친구의 옛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조개찜과 구이를 안주로 술을 잔뜩 먹고 노래방에 가 노래도 불렀다. 아침은 인근에서 굴국밥, 점심은 돌아오는 길에 밀양 유천본동식당에서 잡어추어탕을 먹었다. 역사가 있는 집인 모양인데 우거지를 넣고 잡어로 추어탕처럼 끓여 낸 게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오가며 해저터널과 거가대교, 짙푸른 바다가 인상에 남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든 오랜 친구들과 대화가 좋았다. 사계동행은 만나고 나면 늘 배우고 조금 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연이 여기에 이른 것에 감사한다. 누구의 건배사처럼 육십에도 무사히 보기를. 여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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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from text 2022/11/27 10:55
어릴 적 눈물의 고향이 그래도 생각해 보면 한 번쯤 날 미소 짓게 한 추억은 있을 거야
세상을 향해 나올 때 난 누굴 의지했나 땅거미 진 창가 별 하나 보여주던 그도 이미 떠난 사랑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이 세상은 보이는 곳 아니야 괴로워 말기 원망도 말기 아름다운 세상만 보기

세상을 향해 나가봐 넌 나를 의지하니 세월 빠르게 지나 우리의 마지막 남아있는 사랑까지
세상 다 아니고 멀지도 않은 너 하나 용서 못하겠니 외로워 않기 슬퍼도 않기 미웠었던 기억도 않기
오래전 그날처럼 초록 나무 이름 모를 꽃 하늘 구름 바람 눈부신 햇빛까지도 사로잡은 오후의 평화
눈물도 놓고 추억도 놓고 사랑했던 사람도 놓고

그래, 올겨울은 이 노래다. 2007년 발표한 심수봉의 11집 타이틀곡 오늘, 문득.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산사를 떠나

from text 2022/11/25 18:52
늙은 목어가 간다. 법당 건너 재 너머, 여기서 저기로. 지치면 잠이 단 법, 오래 지치면 영원한 수면도 두렵지 않겠구나. 그리움에 지치면 영영 잊기도 한다니, 긴 꿈에서 깨어 긴 잠에 들면 꿈이 무어고 잠이 다 무어랴. 찬바람 한 번에 간밤의 국화도 색이 바랬다. 절간 돌절구에 살얼음이 끼고 운판은 저 혼자 울었다. 덧없이 가노라만 어찌 너나 나만의 일이랴. 모퉁이마다 마른 물고기가 걸렸다. 빈속에 마른잎을 채웠다. 돌아갈 길 없구나. 법고와 범종이 따라 울었다. 마른풀에 꽃이 피고 산새가 날았다. 너와 누운 자리였나, 먼일처럼 눈발이 날린다.

만추

from text 2022/11/13 07:45
토요일 저녁, 늦가을의 길거리는 온통 낙엽이었다. 상가들은 불만 밝혔고 아무도 없었다. 이천동과 봉덕동의 경계, 바람도 없이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11월 중순에 이렇게 포근한 날이 있었나. 많은 잎을 단 나무들이 많은 잎을 떨어뜨렸고 떨어진 잎들이 눈처럼 쌓였다. 한 쌍의 새가 버즘나무 이파리를 피해 노란 무덤으로 날아들었다. 부리를 비비며 인연이란 게 있을까,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는 멀리 날아가려마. 나는 무덤을 파헤치듯 길을 내 새를 쫓았다. 기다리는 이에게 기다리지 말라 일렀다.

* 더러 서너 잔을 먹은 때가 없지는 않다만, 어쩌다 한두 잔만 먹겠다는 결심을 잘 지키고 있다. 그런대로 오래오래 갈 수도 있겠다. 식구야 논외로 하고, 늘 그렇듯 조금의 일탈이야 없으랴만.

단풍

from text 2022/11/10 18:08
세상 나무들이 단풍에 든다. 지난봄 새로 잎이 나올 때처럼 서럽지는 않다.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의 마음이 다를까. 이별이 예정되어 있어도 제가끔 할 일을 한다. 엽록소도 안토시아닌과 카로틴도 제 몫을 다했다. 수면을 일렁이는 바람의 양에 따라 거기 사는 물고기의 양이 정해진다지. 신진대사의 절정이어라. 바람이 불고, 단풍이 든다.

병 속의 새

from text 2022/11/02 21:06
인간이 존엄할까, 인간은 존엄한가 묻는다면
존엄한 인간이 있고,
존엄할 때나 존엄한 때가 있다고 답할밖에.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니
참으로 덧없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병 속의 새는
병 속이 딱 세상의 전부가 아닌가 되물을밖에.

아버지의 역사

from text 2022/10/29 01:02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따뜻함과 해학이 있다. 남도 사투리의 정겨움 속에 어쩐지 슬픔과 아픔이 있으며, 물 흐르듯 읽히는 중에 저도 모르게 웃고 울게 된다. 웃으며 울거나 울면서 웃게 된다. 사람의 도리와, 사람이 무어며 사람이 산다는 게 무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글을 쓰겠다는 허망을 한때 치기로 알고 진작에 그만두기를 얼마나 잘했나 싶다. 어쩐지 마음이 시린 작중 한 대목.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어 물며 돌아오던 신작로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산들거렸다.

읽으면서 우일문의 시시한 역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았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역사가 될 오늘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내일이라고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진짜는 드문 법이다. 밤이 깊다. 자꾸 뭔가를 놓고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남루한 흔적들

from text 2022/10/25 18:48
고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한 아버지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 옷가지며 책, 노트, 소지품들을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 뒤늦게 어머니가 교과서 서너 권을 겨우 건졌다. 그날따라 이상한 살기 같은 걸 느끼고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 나는 골목길에서 기름통을 들고 오던 아버지를 보고 그대로 뛰어 달아나 나중에야 불탄 사실을 알았다. 그길로 친구놈 손에 끌려 마지못해 다시 집과 학교에 돌아오기까지 오십 일을 넘게 밖에서 생활하였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카드, 여러 습작물과 기록이 있는 노트, 각종 유인물들을 후미진 캠퍼스 한 곳에서 몽땅 태웠다. 당시로서는 잡힐 것을 각오하고 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불탄 것에도 무어 대단한 것이야 있었겠냐마는 역시 훗날 아쉽고 그리울 때가 많았다.

며칠 전 무얼 좀 뒤지다가 1992년 5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쓴 일기를 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나마 잠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줄기차게 술을 마신 일과 함께 비루하고 가련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독서의 흔적과 보아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오래 잊고 있던 서울과 부천에서의 생활, 좌골신경통, 잠시 취업한 동해프로테인, 성주 초전에서의 노가다, 제록스 영업, 이츠야미, 다시 학교를 다닌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그 사람들과 그 세계, 어쩐지 작고 여린 나를 볼 수 있었다.

술과 사람들에 얽힌 남루한 흔적들, 가끔 이 블로그의 지난 글들을 보며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래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어쩌면 나는 한때 다른 말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