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408건

  1. 저무는 꿈 2026/04/28
  2. 별의 길을 찾아서 2026/04/19
  3. 부처꽃 2026/04/08
  4. 그날 2026/03/13
  5. 차곡차곡 2026/02/17
  6. 올드 리프 2026/02/16
  7. 사월을 노래하며 2026/01/22
  8. 바람의 꿈 2026/01/01
  9. 먼길 2025/12/02
  10. 가을산 2025/11/01
  11. 울산대왕암 2025/10/19
  12. 가을이 오고 2025/09/28
  13. 제주도 2025/09/05
  14. 어느 하루 2025/08/15
  15. 장진주 2025/07/22
  16. 잔만딱두 2025/07/18

저무는 꿈

from text 2026/04/28 19:08
대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주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으며 그릇을 넓히되 더 담으려 하지 않고 불완전한 것을 사랑하려 애썼다. 삶의 한때를 허투루 보내기도 하였으나 빛나는 한때를 옛 나무에 새기기도 하였다.

어느 날 보니 몇 년씩 뭉텅이로 사라졌던데 이제 그만 해롱거리고 남은 세월 어찌 지나나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열꽃처럼 번지는 옛 사랑을 만났다.

낙치, 백발이야 막으랴만 가는 길 돌아설까 하니, 저 앞에 보이는 것이 네가 아니냐. 울긋불긋 지나온 날들이 아니냐. 기다리는 것이 훗날이요 옛날이 아니냐.

저무는 꿈을 꾸었구나. 저물되 저물지 않는 꿈을 꾸었구나.

별의 길을 찾아서

from text 2026/04/19 06:22
지지난 금요일, 하루 연가를 내고 결혼 25주년을 핑계로 0124님과 부산에 다녀왔다. 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보수동 책방골목, 깡통시장, 국제시장, 용두산공원, 자갈치시장, 해안시장을 두루 다녔다. 생선구이와 참가자미회, 도다리쑥국을 먹었고 상비약도 샀다. 돌아보자니 그 골목길, 삼랑진, 물금, 구포 같은 이름들과 주먹만한 동백꽃들이 떠오른다. 열차 창밖으로 먼 꽃나무들이 예뻤다.

별을 따라 바른 길을 간 한 소년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넓은 길도 아니고 빠른 길도 아닌, 별의 길을 찾아서.

다시 한 번, 가볍게 먹고, 비우고, 움직이기로 마음을 다진다. 다음은 이근배의 냉이꽃.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을 모른다
초가집이 살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음이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부처꽃

from text 2026/04/08 20:52
허무를 허물고 나는 가네 눈먼 새처럼 작은 집을 지었지 마른 잎들과 해묵은 감정들과 철 지난 이데올로기들 걷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네 사랑에 눈먼 작은 새처럼 훨훨 저 길 끝에 닿고 싶었네

저 길 끝이 먼저 닿아 해거름에 꽃을 피웠네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명 같던 줄을 세월에 묻고 하염없이 적멸을 기다리는 거미처럼 허문 마음들이 더는 꿈도 꾸지 않으리라

그날

from text 2026/03/13 07:02
잔존 알코올이 우군을 부르는 저녁, 무단으로 네 기억을 횡단한다. 달라질 수 있을까. 노을 질 무렵이면 밤과 낮처럼 다시 볼 수 있을까. 꽃 먼저 두고 봄이 오듯 너를 두고 청춘이 가는구나. 홍매와 백매가 어우러진 날 벽력 같은 눈이 내렸지. 다 길이 되던 세상, 온통 하얗기만 하였을까. 새 알코올이 잠식하는 동안 눈 위에 찍힌 저 자국이라니.

차곡차곡

from text 2026/02/17 06:20
벽돌을 한 장 한 장 얹어 집을 지었네. 한쪽으로 창을 내고 다른 쪽으론 흔들의자를 두었지. 흔들흔들거리며 살 거라고,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보며 잠들 거라고. 꽃나무를 심고 닭을 키우며 살고 싶었네. 먼 못에서 세월 같은 물고기 몇 마리 낚으면 나도 그만 목이 메어 한물간 가수들처럼 노래도 불렀으리라. 불멸자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필멸자에게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연 가루에 외로움 몇 방울 이겨 알록달록 살림을 차리고, 칸살 너머 달이 뜨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며 술잔도 비웠으리라. 슬픔과 설움 같은 것들을 헐어 봉분 같은 집을 지키고 차곡차곡 꿈들을 접었으리라.

올드 리프

from text 2026/02/16 05:28
그때 너는 어리고 어리석어 운율과 운행을 알지 못했다. 생멸의 이치를 몰랐다. 네 날개는 사라졌다. 부토니에에 꽃 대신 나비가 내려앉았다. 이제 그만, 가도 그만. 작은 구멍에 훨훨 나는 꿈만 남았다. 삐딱한 저 세계를 보라. 그예 달이 떴지 않느냐.

사월을 노래하며

from text 2026/01/22 20:22
이상한 일이다. 그때나 지금의 인연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기억과 사실과 상상이 뒤섞여 앞과 뒤가 분간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살아 있고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 번 본 건 기억을 할 수 없다. 한 번 얘기한 것이나 한 번 들은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비극만의 서사를 가졌다.

죽은 사람과의 의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목련이 하얗게 필 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비극적 서사 위에서만 희망과 전망이 있을 수 있다. 비극 위에서만 극적 의미가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때 살아온 굴곡과 질곡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뭘 미루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나중 먹을 술을 위하여 지금 술을 아껴야지. 사월을 노래하며 다음을 기다리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나야지.

바람의 꿈

from text 2026/01/01 09:06
처음 제식을 만든 이들과 처음 예식을 행하던 이들, 열과 빛을 나누고 소리 없는 명령을 이행하던 그들, 허무를 감당하는 영혼들처럼 그렇게, 꿈을 꾸는 자, 열매를 품은 씨앗, 눈밭에 쓰러진 토끼, 목매단 꿩, 나무를 닮은 닭들과 함께, 복권 없는 당첨을 바라며, 과거로, 우주로, 기억으로 기억을 지우고 망각을 망각으로 대체하며, 먼지처럼 흩어질 자 누구인가. 어제 같은 해가 뜨고 어제처럼 한 세계가 진다.

먼길

from text 2025/12/02 19:48
꿈을 꾼 걸 보니 잠을 잔 게로구나. 오래 헤맸으니 오래 머무렴. 호랑가시나무 새빨간 열매, 오래 걷고 오래 견딘 저 피로를 보렴. 잎맥에서 길을 찾았느니 떡갈나무 너른 품이 좋아라. 에헤야, 간단다 간단다 저리 저멀리.

그래, 지고 가야 할 것이 있고 두고 가야 할 것도 있겠지. 다음은 목성균의 수필 새벽 등산 첫 문단. 그러고 보니 새벽에 산에 오른 적이 없구나. 날이 좀 좋아지면 꼭 한번 올라 행렬을 함께하리라.

새벽 산에 올라가서 자고 난 맑은 눈으로 날 새는 건너 산을 보면 먼길 떠나는 나무들의 행렬이 보인다. 나무들은 곁에서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먼길을 와서 먼길을 빙하처럼 아주 천천히 산을 통째로 밀고 간다. 그건 욕계(欲界)가 깨어나기 전, 신새벽에나 볼 수 있다. 밝아 오는 산등성이의 나무를 보면 비로소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길은 단숨에 달려가려는 자발적인 출발의 가까운 길이 아니다. 묵묵히 댓돌에 앉아서 한참 동안 마음을 모아 신들메를 매고 비로소 천천히 무겁게 일어나서 사립을 나서는 남자의 굽힘 없는 의지 같은 아주 먼길이다. 서두르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평생 동안 가야 할 먼길. 날 새는 건너편 산등성일 건너다보면 나무의 가는 길이 보인다.

가을산

from text 2025/11/01 14:28
노랗거나 붉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는 감나무를 보다 문득 어린 시절 감꽃을 실에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서 주던 여자아이 생각이 났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소년의 새처럼 작은 가슴과 함께 문득 생각이 났다. 아침에 산을 찾아 걷다 가을산이 생멸하는 모든 것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을 빌려 우우 우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늘 거기 있던 겨울산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송찬호의 만년필 전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울산대왕암

from text 2025/10/19 11:30
높은 압력에는 낮은 힘으로 오래 맞설 일, 밤이 되면 나무와 나무 사이 섬에서 근본을 생각하는 새처럼 이미 사라진 것들을 위해 목을 놓아 우노라. 저 길은 그해 지나온 길, 운행을 멈추고 질서를 궁리하는 어느 별처럼 하릴없이 공배를 메우며 다시 길을 가노라.

유난히 흐리고 비가 잦은 가을이다. 어제 단체로 울산대왕암에 다녀왔다. 자의왕후를 잠시, 그리고 오래 지난날을 생각하였다. 석 잔에 그친 감회가 따사롭다.

울울창창 푸른 바다에
산금의 노래 드높구나
대왕의 길을 가는 이 누구인가
왕후의 넋이 애닯도다
암릉에 서린 날들이 내일을 말하리라

가을이 오고

from text 2025/09/28 20:02
새 막이 오르듯 가을이 오고 청춘이 간다. 먼일을 생각하며 뜨거운 세월을 욕조에 가두고 탄산수에 위스키 풀 듯 몸을 푼다. 어떤 가려움과 어떤 미련 같은 것들이 부수수 솟아나 풍미가 사라진 알코올을 따라 흐른다. 흐린 기억들이 하나둘 살아났다 사라진다.

바둑, 책 읽기, 영화, 드라마, 음악 감상, 걷기, 카메라 만지기, 블로그 운영, 식물, 열대어 키우기, 만년필, 위스키 즐기기, 반신욕, 그리고 공상과 망상 정도로 취미가 이어지고 있다. 수박 겉핥기식이나마 계속하는 것도 있고 멈춘 것도 있다. 약간 수집벽과 정리벽이 있어 진짜 취미가 집이나 공간 가꾸기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새처럼 작은 가슴에 새처럼 작은 마을이 산다. 너그럽지 않은 날들이 간다.

제주도

from text 2025/09/05 20:04
지난 수요일, 0124님의 갑작스런 제안에 응하여 당일치기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침 6시 35분 출발하여 저녁 8시 25분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 중문면세점에서 카발란 비노바리끄와 아벨라워 아부나흐를 사고, 주상절리대, 송악산을 들렀다가 협재로 넘어가 해안도로를 따라 돌아왔다. 역시 더울 때에는 어디 나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하였지만, 모처럼 쐬는 바깥 바람이 나쁘지 않았다. 산방산과 송악산 앞 바닷빛과 애월 쪽 길 느낌이 좋았다. 지나다 우연히 본 귤림성 이정표가 반가웠다. 투덜거릴 줄이나 아는 부실한 몸뚱아리를 데리고 종일 운전하며 다닌 0124님의 노고 덕에 호사를 누렸다.

위스키를 모아놓고 눈호강이나 하며 어쩌다 몇 잔 먹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취하는 자리, 취하는 사람이야 그립지 않으랴만, 어쩌랴, 그립다고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

어느 하루

from text 2025/08/15 20:24
한 세월 중독자처럼 살기도 하였고 한 시절 눈보라처럼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바람 따라 훨훨, 여름에는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이면 봄을 반겼지. 흙에서 흙으로, 한세상 푸르른 심연을 바라보며 살았다. 어느 하루, 긴 잠 끝에 긴 꿈을 접고.

인생은 진리 탐구의 영역이 아니라 같은 전제에서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하고 다른 전제에서 같은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답이다. 산다는 게 여전히 새삼스럽기 한이 없구나. 모쪼록 누구든 오래도록 살아 있으라.

장진주

from text 2025/07/22 18:05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콸콸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것을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권세 높은 사람들도 밝은 거울 앞에서는 센 머리를 슬퍼함을
아침에는 푸른 실 같았거니 저녁 무렵 흰 눈으로 되었네
사람으로 태어나서 큰 뜻을 이뤘다면 모름지기 온갖 기쁨 다 누려야 하는 것을
술도 안 든 금단지가 달 맞는 일 없게 하라
하늘이 나를 낳고 재주까지 주셨으니 반드시 있으리라 긴요하게 쓰일 일이
천금이나 많은 재물 마구 뿌려 쓴다 해도 되돌아오는 것이 이 세상 이치일세
양 잡아라 소도 삶고 이제부터 즐기리라
마신다면 한 자리에 삼백 잔은 되어야지
잠부자여, 단구생이여
술 한 잔 올리오니 그대들은 막지 마소
그대들께 바치리니 한 곡조 술 노래를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주오
귀한 음악 산해진미 그 무엇이 부럽겠소
바라기는 오직 하나 오래 취해 안 깨는 것
예로부터 성인, 현인 모두 죽어 쓸쓸한데
이름 남긴 사람들은 술꾼들뿐이로다
그 옛날에 진사왕이 평락관서 벌인 잔치
만금 줘야 사는 술을 흥청망청 마셔댔지
주인아! 어찌하여 돈 없다고 말하는고
곧바로 술을 구해 그대들께 따르리라
오화마도 천금구도 아까울 것 무엇이뇨
아이 불러 내보내서 맛난 술과 바꿔오라
그대들과 함께하며 오랜 시름 녹이리라

李白의 將進酒. 며칠 전 연세 지긋하신 어떤 분이 한자 원문으로 부르는 창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술을 앞에 두고도 마시지 않았으나 계속 떠올라 옮겨 둔다. 정철의 장진주사도 그렇고, 즐기고 누리는 일이 아득하기만 하여라.

잔만딱두

from text 2025/07/18 06:18
즐기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좋아하여 자주 하다, 즐겁게 누리다라고 한다. 누리다는 마음껏 즐기거나 맛보다라고 하고. 자주, 마음껏 말고 적당히, 나누어 천천히 즐기자는 생각을 언제부터 하였던가. 처음 하는 각오인 듯, 마음을 굳게 다지고자 사전도 찾고 기록도 남긴다. 잔만딱두, 두너!!

*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아껴 읽고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아까워 한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곤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 읽으면 옆에 두고 더 오랫동안 다시 읽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