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413건

  1. 종국에는 2026/08/20
  2. 처음인 듯, 2026/07/19
  3. 하지를 지나며 2026/06/21
  4. 무정처 2026/06/18
  5. 에헤야 2026/05/31
  6. 저무는 꿈 2026/04/28
  7. 별의 길을 찾아서 2026/04/19
  8. 부처꽃 2026/04/08
  9. 그날 2026/03/13
  10. 차곡차곡 2026/02/17
  11. 올드 리프 2026/02/16
  12. 사월을 노래하며 2026/01/22
  13. 바람의 꿈 2026/01/01
  14. 먼길 2025/12/02
  15. 가을산 2025/11/01
  16. 울산대왕암 2025/10/19

종국에는

from text 2026/08/20 18:56
감정도 세상도 무뎌지기 마련.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걸 만드는 거라지. 나는 나를 만들었으되 내가 아닌 것처럼 떠날 모양이로구나. 다음은 이대흠의 애월(涯月)에서 전문. 뭐랄까, 너도 붙박이별이 아니었달까.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면서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처음인 듯,

from text 2026/07/19 04:48
그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꽃이 필 때 소리가 난다고 했나. 어쩌면 그 고개를 넘을 때 내가 들었던 소리.
잘 있다가도 안 좋을 때면 더 안 좋게 만들어버리고 독에 물든 놈처럼 갈 데까지 가보는 습성을 이제야 버릴 수 있으려나. 진짜 나이가 드는 건 또 지금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무엇이 그렇게 괴롭고 힘들다고, 그 작은 가슴들마다 그렇게 상처를 남겼는지.
다르게 살아야겠구나. 그래, 그래야겠구나.

하지를 지나며

from text 2026/06/21 18:45
어제 해가 유난히 길어 보이더니 오늘이 하지로구나. 다섯 시 구 분에 해가 떠 일곱 시 사십사 분에 진다고 하니 열네 시간 삼십오 분이 낮인 셈이다. 동지를 지나며 새해, 새봄을 맞는 기분으로 가는 해와 이른 가을 냄새를 맡아볼 일이다.

해가 길어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늘어만 가던 몸무게가 열다섯 근이 줄었으며 압력이 조금 낮아졌다. 알 수 없는 피부 질환에 시달렸고 낯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술에서 많이 멀어졌다. 밤이 길어지는 동안, 여전히 달라질 건 없지만 또 많은 게 달라질지 모르겠다. 다음은 정호승의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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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처

from text 2026/06/18 19:50
오랜 시간이 지나고, 길 하나 건너. 네 땅과 네 하늘이 맞닿은 날, 절이 절로 열반에 들었구나. 탄창이 비었어. 손가락보다 크고 발가락보다 큰 물집에는 누가 사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문득. 그럼, 가던 길 가는 거지. 소리쳐 합장하고, 부처도 없이.

에헤야

from text 2026/05/31 07:45
언제부터일까. 새로 추억할 거리는 생기지 않고 지난 추억은 하나둘 사라져 간다. 늘 그랬다. 어제는 오늘보다 어렸고 돌이켜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늘 열에 들떠 있거나 축 늘어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조금 더 세련되고 조금 더 성숙하지 못했을까. 무슨 배짱으로 이리저리 재지 않고 사고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을까. 돌아오지 않을 순간인 줄 왜 몰랐을까. 타고난 호흡이 거칠어 짧은 글밖에 쓰지 못하고 바로 앞도 겨우 살피면서 어쩌자고 그랬을까. 잘아빠진 성정에 모든 게 헐렁하더니 달고 긴 잠에 취해 가는 곳 몰랐구나. 돌고 돌아 제자리 맴맴이었구나.

저무는 꿈

from text 2026/04/28 19:08
대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주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으며 그릇을 넓히되 더 담으려 하지 않고 불완전한 것을 사랑하려 애썼다. 삶의 한때를 허투루 보내기도 하였으나 빛나는 한때를 옛 나무에 새기기도 하였다.

어느 날 보니 몇 년씩 뭉텅이로 사라졌던데 이제 그만 해롱거리고 남은 세월 어찌 지나나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열꽃처럼 번지는 옛 사랑을 만났다.

낙치, 백발이야 막으랴만 가는 길 돌아설까 하니, 저 앞에 보이는 것이 네가 아니냐. 울긋불긋 지나온 날들이 아니냐. 기다리는 것이 훗날이요 옛날이 아니냐.

저무는 꿈을 꾸었구나. 저물되 저물지 않는 꿈을 꾸었구나.

별의 길을 찾아서

from text 2026/04/19 06:22
지지난 금요일, 하루 연가를 내고 결혼 25주년을 핑계로 0124님과 부산에 다녀왔다. 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보수동 책방골목, 깡통시장, 국제시장, 용두산공원, 자갈치시장, 해안시장을 두루 다녔다. 생선구이와 참가자미회, 도다리쑥국을 먹었고 상비약도 샀다. 돌아보자니 그 골목길, 삼랑진, 물금, 구포 같은 이름들과 주먹만한 동백꽃들이 떠오른다. 열차 창밖으로 먼 꽃나무들이 예뻤다.

별을 따라 바른 길을 간 한 소년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넓은 길도 아니고 빠른 길도 아닌, 별의 길을 찾아서.

다시 한 번, 가볍게 먹고, 비우고, 움직이기로 마음을 다진다. 다음은 이근배의 냉이꽃.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을 모른다
초가집이 살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음이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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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꽃

from text 2026/04/08 20:52
허무를 허물고 나는 가네 눈먼 새처럼 작은 집을 지었지 마른 잎들과 해묵은 감정들과 철 지난 이데올로기들 걷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네 사랑에 눈먼 작은 새처럼 훨훨 저 길 끝에 닿고 싶었네

저 길 끝이 먼저 닿아 해거름에 꽃을 피웠네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명 같던 줄을 세월에 묻고 하염없이 적멸을 기다리는 거미처럼 허문 마음들이 더는 꿈도 꾸지 않으리라

그날

from text 2026/03/13 07:02
잔존 알코올이 우군을 부르는 저녁, 무단으로 네 기억을 횡단한다. 달라질 수 있을까. 노을 질 무렵이면 밤과 낮처럼 다시 볼 수 있을까. 꽃 먼저 두고 봄이 오듯 너를 두고 청춘이 가는구나. 홍매와 백매가 어우러진 날 벽력 같은 눈이 내렸지. 다 길이 되던 세상, 온통 하얗기만 하였을까. 새 알코올이 잠식하는 동안 눈 위에 찍힌 저 자국이라니.

차곡차곡

from text 2026/02/17 06:20
벽돌을 한 장 한 장 얹어 집을 지었네. 한쪽으로 창을 내고 다른 쪽으론 흔들의자를 두었지. 흔들흔들거리며 살 거라고,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보며 잠들 거라고. 꽃나무를 심고 닭을 키우며 살고 싶었네. 먼 못에서 세월 같은 물고기 몇 마리 낚으면 나도 그만 목이 메어 한물간 가수들처럼 노래도 불렀으리라. 불멸자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필멸자에게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연 가루에 외로움 몇 방울 이겨 알록달록 살림을 차리고, 칸살 너머 달이 뜨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며 술잔도 비웠으리라. 슬픔과 설움 같은 것들을 헐어 봉분 같은 집을 지키고 차곡차곡 꿈들을 접었으리라.

올드 리프

from text 2026/02/16 05:28
그때 너는 어리고 어리석어 운율과 운행을 알지 못했다. 생멸의 이치를 몰랐다. 네 날개는 사라졌다. 부토니에에 꽃 대신 나비가 내려앉았다. 이제 그만, 가도 그만. 작은 구멍에 훨훨 나는 꿈만 남았다. 삐딱한 저 세계를 보라. 그예 달이 떴지 않느냐.

사월을 노래하며

from text 2026/01/22 20:22
이상한 일이다. 그때나 지금의 인연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기억과 사실과 상상이 뒤섞여 앞과 뒤가 분간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살아 있고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 번 본 건 기억을 할 수 없다. 한 번 얘기한 것이나 한 번 들은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비극만의 서사를 가졌다.

죽은 사람과의 의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목련이 하얗게 필 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비극적 서사 위에서만 희망과 전망이 있을 수 있다. 비극 위에서만 극적 의미가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때 살아온 굴곡과 질곡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뭘 미루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나중 먹을 술을 위하여 지금 술을 아껴야지. 사월을 노래하며 다음을 기다리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나야지.

바람의 꿈

from text 2026/01/01 09:06
처음 제식을 만든 이들과 처음 예식을 행하던 이들, 열과 빛을 나누고 소리 없는 명령을 이행하던 그들, 허무를 감당하는 영혼들처럼 그렇게, 꿈을 꾸는 자, 열매를 품은 씨앗, 눈밭에 쓰러진 토끼, 목매단 꿩, 나무를 닮은 닭들과 함께, 복권 없는 당첨을 바라며, 과거로, 우주로, 기억으로 기억을 지우고 망각을 망각으로 대체하며, 먼지처럼 흩어질 자 누구인가. 어제 같은 해가 뜨고 어제처럼 한 세계가 진다.

먼길

from text 2025/12/02 19:48
꿈을 꾼 걸 보니 잠을 잔 게로구나. 오래 헤맸으니 오래 머무렴. 호랑가시나무 새빨간 열매, 오래 걷고 오래 견딘 저 피로를 보렴. 잎맥에서 길을 찾았느니 떡갈나무 너른 품이 좋아라. 에헤야, 간단다 간단다 저리 저멀리.

그래, 지고 가야 할 것이 있고 두고 가야 할 것도 있겠지. 다음은 목성균의 수필 새벽 등산 첫 문단. 그러고 보니 새벽에 산에 오른 적이 없구나. 날이 좀 좋아지면 꼭 한번 올라 행렬을 함께하리라.

새벽 산에 올라가서 자고 난 맑은 눈으로 날 새는 건너 산을 보면 먼길 떠나는 나무들의 행렬이 보인다. 나무들은 곁에서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먼길을 와서 먼길을 빙하처럼 아주 천천히 산을 통째로 밀고 간다. 그건 욕계(欲界)가 깨어나기 전, 신새벽에나 볼 수 있다. 밝아 오는 산등성이의 나무를 보면 비로소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길은 단숨에 달려가려는 자발적인 출발의 가까운 길이 아니다. 묵묵히 댓돌에 앉아서 한참 동안 마음을 모아 신들메를 매고 비로소 천천히 무겁게 일어나서 사립을 나서는 남자의 굽힘 없는 의지 같은 아주 먼길이다. 서두르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평생 동안 가야 할 먼길. 날 새는 건너편 산등성일 건너다보면 나무의 가는 길이 보인다.

가을산

from text 2025/11/01 14:28
노랗거나 붉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는 감나무를 보다 문득 어린 시절 감꽃을 실에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서 주던 여자아이 생각이 났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소년의 새처럼 작은 가슴과 함께 문득 생각이 났다. 아침에 산을 찾아 걷다 가을산이 생멸하는 모든 것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을 빌려 우우 우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늘 거기 있던 겨울산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송찬호의 만년필 전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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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왕암

from text 2025/10/19 11:30
높은 압력에는 낮은 힘으로 오래 맞설 일, 밤이 되면 나무와 나무 사이 섬에서 근본을 생각하는 새처럼 이미 사라진 것들을 위해 목을 놓아 우노라. 저 길은 그해 지나온 길, 운행을 멈추고 질서를 궁리하는 어느 별처럼 하릴없이 공배를 메우며 다시 길을 가노라.

유난히 흐리고 비가 잦은 가을이다. 어제 단체로 울산대왕암에 다녀왔다. 자의왕후를 잠시, 그리고 오래 지난날을 생각하였다. 석 잔에 그친 감회가 따사롭다.

울울창창 푸른 바다에
산금의 노래 드높구나
대왕의 길을 가는 이 누구인가
왕후의 넋이 애닯도다
암릉에 서린 날들이 내일을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