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유칼립투스 2022/06/03
  2. 제대로 2022/05/11
  3. 사람이 잠깐 2022/05/04
  4. 다른 삶 2022/04/04
  5. 파국 이후 2022/03/28
  6. 마음의 준비 2022/03/20
  7. 권주가 2022/03/19
  8. 봄꽃 2022/03/14
  9. 어떤 소식 2022/02/28
  10. 단꿈 2022/02/13
  11. 어느 저녁 2022/01/12
  12. 지난날처럼 2022/01/04
  13. 보고 싶은 얼굴 2021/10/31
  14. 청춘 2021/10/21
  15. 가을비 오는 날 2021/10/11
  16. 퇴근길 2021/10/08

유칼립투스

from text 2022/06/03 13:50
봄이라 라일락이나 아까시꽃이 만발하거나 어쩌다 잘 차려 입은 여인네가 분내 날리며 스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함께 속내 나눌 사람이 그리워 더 멀리 걷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한때 시커먼 속내 몰래 나누던 누군가를 생각하기도 한다. 공기에 열기가 절반, 수분이 절반. 어차피 가뭇없을 일들이 새삼 새삼스럽다. 서사가 없어도 다툴 정분이 없어도 그 향내, 그 분내 속에 글쎄, 사는 게 조금 하찮기도 하고 조금 겁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봉덕동 유칼립투스. 늘 블루스 음악이 흐르고 자는 시간 외에는 마셔야만 할 것 같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여섯 개 정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초상이 있고, 마른 꽃이 걸린 한쪽 벽에는 유칼립투스가 그리스어로 덮여 있다 혹은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고 코알라에게 신경안정제 역할을 하며 꽃말은 추억이라고 적혀 있다. 잔뜩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데가 아닐 수 없다. 안주는 대체로 치즈나 과일 몇 조각. 어쩌다 봄이면 주인장이 장만한 옻순이나 가죽순을 맛볼 수도 있다.

여름이 내려앉은 밤거리는 아무렇게나 울고 노래하는 취객을 허용한다. 서로는 서로 분내 같은 추억만 남기고 가뭇없이 가버린 사람처럼 안부를 주고받을 뿐.

제대로

from text 2022/05/11 12:32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의 길 전문. 1936년 잡지 조광에 발표되었으며, 1992년 깊은샘 출판사에서 시, 수필, 시론을 묶어 같은 제목의 책으로 펴내면서 당시 맞춤법에 맞게 실었다. 수필로 쓴 것을 시로 많이들 혼동한다고 하는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모처럼 글 한 편에 온 몸과 온 마음이 저렸다. 이즈음 파친코에 이어 나의 해방일지에 푹 빠져 있으며, 이 정부에 주류세라도 안 낼 고민을 하고 있다. 황폐한 마음을 달래느라 많이 소홀하였다. 좋은 핑곗거리도 있으니, 다른 즐거움도 찾고 몸도 좀 가꾸어야겠다. 제대로 버티고, 제대로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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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잠깐

from text 2022/05/04 08:55
어제, 휴가를 내고 모처럼 산에 올랐다. 늦게나마 진달래 군락지를 볼 욕심에 화왕산을 고르고, 무릎에 무리가 갈까 완만한 길을 찾아 옥천매표소에서 임도를 타고 옥천삼거리를 지나 정상으로 올랐다. 정상 부근 너른 평원에 진달래는 다 지고 금빛 억새만 장관이었다. 언젠가 가을에 은빛 억새밭을 본 기억이 어슴푸레하였다. 다섯 시간을 오르내리고 마침 창녕 장날이라 장 구경을 하고 송화버섯, 두릅, 제피 등속을 샀다. 시장 어귀에서 수구레국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내친 김에 우포늪을 찾아 오래 걸었다. 해지는 풍광과 아까시 꽃향기가 좋았다. 돌아와서는 하산주로 방천시장 인근 동곡막걸리에서 모듬전에 막걸리를 한잔하였다.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집이었다. 0124님 덕분에 하루가 온전하였다.

지을 작(作)은 사람 인(人)과 잠깐 사(乍)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이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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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from text 2022/04/04 11:14
다른 삶을 살았다면 룸펜으로 살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용기가 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 떨어진 낭만이나마 비굴하지 않게 한 세상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정 많은 사람들을 만나 영 굶주리지는 않았겠지. 한때 룸펜 같던 삶과 그 정신의 한 자락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다가오지 않는데 다가갈 일 없다. 자꾸 오락가락하는 건 나이와 술 탓이겠지. 다 부질없다가도 다 붙들고 싶기도 한 것이.

파국 이후

from text 2022/03/28 13:50
육 개월이면 사라질 감정이어도, 더는 특별하지 않아 다시 볼 수 없을 사람이어도, 행여 어떤 후회가 일어도 멈추거나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상처를 훈장처럼 가슴에 단 채, 파국 이전에는 무얼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다. 흉터처럼 남은 사랑은 때가 되면 다른 흉터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지만, 상처를 만드는 통쾌함과 아무는 가려움을 잊지 못한다. 여전히 멈추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파국 이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매화가 지고 목련이 피었다. 서양수수꽃다리는 새잎을 내밀었다. 어김없는 반복에도, 노인은 졸고 아기는 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오고, 가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간다.

마음의 준비

from text 2022/03/20 20:30
반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 남은 날들 중에 지금이 가장 좋을 때요, 이제 가장 좋을 날들만 순차적으로 남은 셈이다. 쇠약해 가는 육신을 따라 어쩌면 생각은 조금 여물고 마음은 덜 부대낄지 모르겠다만.

휴일 아침,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화양연화를 다시 보았다. 잠시 비밀을 봉했던 진흙이 풀리고 풀씨와 꽃씨 같은 것들이 날아다녔다. 누구에게나 벼르던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 '먼지 쌓인 유리창'은 아랑곳없이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거기나 여기나 시간과 기억이 헝클어지기는 매한가지,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제목은 작중 양조위의 대사 '나 좀 도와줄래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요'에서 따온 것. 이별 연습으로 유명했던.

권주가

from text 2022/03/19 12:19
며칠 흐리고 비가 내렸다. 봄은, 봄이 오기 전은 언제나 사계절이 섞여 어제는 초여름이었다가 오늘은 초겨울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젊음이었고 못 견디게 사무친 것은 네 눈빛이 아니라 피안의 손짓이었다. 바람이 불어 한겨울이더니 바람이 불어 봄이로구나.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절이었고, 네가 아니라 나였다. 만개했던 매화 꽃잎이 비에 젖어 구겨진 채 바람에 날린다. 이 봄에는 꼭 꽃구경도 하란다. 산에 올라 진달래도 보고 꽃길도 걸으란다. 가고 오지 않음만 일일까. 잔도 없이 찬도 없이 무어라 무어라 자꾸만 권주가를 부른다.

봄꽃

from text 2022/03/14 08:47
부질없는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봄, 너는
불꽃이로구나.
부질없는 것을
부질없게 만드는
너는 불꽃이로구나.

어떤 소식

from text 2022/02/28 11:37
많은 일들이 그렇듯 좋은 줄 몰랐던 그때가 좋았다. 돌아보면 지금도 그때가 될 것이지만 더는 젊지 않으니 어쩌랴. 마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송창식의 잊읍시다를 느리게 느리게 불러 본다. '간밤 꾸었던 슬픈 꿈일랑 아침 햇살에 어둠 가시듯 잊어버리고, 함께 피웠던 모닥불도 함께 쌓았던 모래성도 없던 일로 해 두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금씩 다시 찾자고' 천천히 천천히 불러 본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표가 난다. 잘 감출수록 잘 드러나는 법, 가는 겨울도 슬픔을 아는 것인가. 터지는 매화 꽃망울이 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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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꿈

from text 2022/02/13 09:12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들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싱글 몰트와 함께한다. 생계는 아름다우나 인생은 슬픈 것. 황금의 물결을 따라 나비떼가 난다. 이나무, 팽나무, 좀작살나무. 바닥 없는 곳으로부터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럿 가운데 하나여도 좋아라. 그래, 아끼기 힘든 것이 어찌 너만이랴. 아낌 없는 마음도, 아끼는 마음도 좋아라. 이 절기에 핑계가 더 필요할까. 다만 잔을 들어 가고 오는 일을 기릴 뿐.

올해도 바싹 마른 봄이 오려나, 유난히 겨울 가뭄이 길다. 그해 가을 같은 날이 올까. 오래된 나무 향에 취해 나무가 꾸는 꿈이 되었다가, 낯선 꿈이 슬퍼 오늘은 오래 울었다.

어느 저녁

from text 2022/01/12 21:43
술이 고픈 저녁, 그림자처럼 길게 몸을 끌며 지나간 이들을 생각한다. 바람이 분다. 겨울 칼바람도 느린 걸음을 재촉하지 못하고 하나둘 불을 켜는 가게들을 위협할 따름이다. 지나간 일들이 지나간 이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다만 술이 고픈 저녁, 겨울 해는 짧아 어째 설움이 긴 것인가. 오늘 마시지 못할손 다시 마시지 못할까마는, 부질없이 마음은 바쁘고 걸음은 더욱 느리다. 지난날처럼 아무데고 혼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지도, 다 늦은 시간에 누구를 부르지도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지나간 이들과 지나간 길을 길게 걷다 보면 마치 여러 사람과 번갈아 술잔을 주고받은 것처럼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도 한다. 가장 먼 길을 가장 길게 걷다 보면 고픈 술을 달래고 지난날처럼 훗날을 기약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쯤이면 길 끝에서 다시 바람이 불고, 시린 눈에는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저녁이 곱게 저문다.

지난날처럼

from text 2022/01/04 20:05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자리가 있고, 아무리 버텨도 취하는 자리가 있다. 역사는 술이 덜 깼을 때 일어나는 법. 오늘처럼 내일도 평온하리니, 누군가를 기다리다 만난다는 건 젊음처럼 분에 넘치는 일이어라. 누군들 다른 삶을 꿈꾸지 않으리오마는, 낭만이라는 게 있던 시절에도 누구나 낭만적으로 살 수는 없었지. 술잔도 그대 따라 저무네. 새로울 일 없어라. 꿈도 취기요, 취기도 다른 꿈이었을 뿐. 지난날처럼 기꺼이 한 잔 보태노니, 한 점, 한 곡에 또 한 세월 가누나.

보고 싶은 얼굴

from text 2021/10/31 15:52
어쩌다 보니 담배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꼬박 일 년이 지났다. 끊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라 그저 한번 안 피워 보자 했던 것이 그렇게 되었다. 아직 책상 서랍에는 뜯지 않은 담배 두 갑과 일회용 라이터가 있다. 술은 지금도 가급적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대체로 절반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횟수는 줄고 먹을 때 양은 오히려 늘었달까. 생각해 보면 몸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니 기실 바뀐 게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만.

며칠 넷플릭스에서 인간실격을 몰아 보았다. 자의식 과잉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저씨 이후 모처럼 드라마 속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보는 내내 끝까지 다 보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지 생각하였다. 이제 이 세계가 낯선 걸 보면 거기서 긴 세월을 보낸 게 틀림없다. '붉은 꽃그늘 아래서 꽃인 양 부풀었던, 남겨진 혼잣말'들에 복 있을진저. 할렐루야.

* 인간의 자격 /화의 나라 /투명인간 /사람 친구 /이름 없는 고통 /아는 여자 /Broken Hallelujah /다윗과 밧세바 /세 사람 /제자리 /금지된 마음 /유실물 /모르는 사람들 /인간실격 /마침표 /별이 빛나는 한낮

청춘

from text 2021/10/21 15:38
세상에는 멀거나 가까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어중간하거나 적당한 것도 있는 거지. 불현듯 겨울이 찾아온 시월 중순, 스산한 마음에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한가득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과 주인을 찾지 못한 말들이 거기 있었구나. 술 한 모금에 기억 한 자락씩 흘려보낸다. 남은 기억이 얼마일까. 찬바람에 손을 내밀다 뭉툭하게 끝이 잘렸다. 잠은 줄고 졸음이 늘었다. 부질없이 가는 게 있을까. 떠난 자리는 비는 것인가. 짧은 가을, 가는 세월에 건배.

가을비 오는 날

from text 2021/10/11 19:40
밤새 기온이 10도 이상 뚝 떨어지더니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린다. 여름이 가을로 가는 결정적 길목을 목도한 기분이다. 어쩌다 너는 그 반지를 그 못에다 던지고, 나는 전당포에다 맡기고 찾지 않았을까. 너를 잊으려다, 너를 잊으려던 나를 잊어버렸을까. 시간만 의미가 없어진 게 아니다. 의미가 있었던 것이 죄다 사라져 버렸다. 굳은살 배긴 발바닥의 기억도, 발굴 현장의 붓자국과 노오란 플레어스커트의 나풀거림도. 빗길을 구르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네 목소리는 들리다 말고, 너는 천천히 내리다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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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from text 2021/10/08 11:17
길어진 저녁, 늦더위 내린 도시의 거리가 새삼스럽다.
시절이 수상한들 세월이 야속한들
계절은 또박또박 구월을 지나 시월로 가고
세모장식, 태성설비, 훈이네분식, 가나헤어살롱
하고많은 간판들을 지나다
인테리어가 한창인 새 이발소 간판을 만났다.
이 시국에 새로 문을 여는 이발소라니
지나갔다고 다 지나간 게 아니구나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하며 박수를 보냈다.
저녁 길은 내리막길
물기 없는 바람이 불고
꽃처럼 잎이 지고,
사무치는 마음이 갈 곳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