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411건

  1. 파국 이후 2022/03/28
  2. 마음의 준비 2022/03/20
  3. 권주가 2022/03/19
  4. 봄꽃 2022/03/14
  5. 어떤 소식 2022/02/28
  6. 단꿈 2022/02/13
  7. 어느 저녁 2022/01/12
  8. 지난날처럼 2022/01/04
  9. 보고 싶은 얼굴 2021/10/31
  10. 청춘 2021/10/21
  11. 가을비 오는 날 2021/10/11
  12. 퇴근길 2021/10/08
  13. 녹슬은 해방구와 강매 2021/10/04
  14. 가을밤 2021/09/12
  15. 여름을 보내며 2021/08/14
  16. 느티나무 아래에서 2021/08/09

파국 이후

from text 2022/03/28 13:50
육 개월이면 사라질 감정이어도, 더는 특별하지 않아 다시 볼 수 없을 사람이어도, 행여 어떤 후회가 일어도 멈추거나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상처를 훈장처럼 가슴에 단 채, 파국 이전에는 무얼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다. 흉터처럼 남은 사랑은 때가 되면 다른 흉터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지만, 상처를 만드는 통쾌함과 아무는 가려움을 잊지 못한다. 여전히 멈추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파국 이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매화가 지고 목련이 피었다. 서양수수꽃다리는 새잎을 내밀었다. 어김없는 반복에도, 노인은 졸고 아기는 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오고, 가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간다.

마음의 준비

from text 2022/03/20 20:30
반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 남은 날들 중에 지금이 가장 좋을 때요, 이제 가장 좋을 날들만 순차적으로 남은 셈이다. 쇠약해 가는 육신을 따라 어쩌면 생각은 조금 여물고 마음은 덜 부대낄지 모르겠다만.

휴일 아침,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화양연화를 다시 보았다. 잠시 비밀을 봉했던 진흙이 풀리고 풀씨와 꽃씨 같은 것들이 날아다녔다. 누구에게나 벼르던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 '먼지 쌓인 유리창'은 아랑곳없이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거기나 여기나 시간과 기억이 헝클어지기는 매한가지,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제목은 작중 양조위의 대사 '나 좀 도와줄래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요'에서 따온 것. 이별 연습으로 유명했던.

권주가

from text 2022/03/19 12:19
며칠 흐리고 비가 내렸다. 봄은, 봄이 오기 전은 언제나 사계절이 섞여 어제는 초여름이었다가 오늘은 초겨울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젊음이었고 못 견디게 사무친 것은 네 눈빛이 아니라 피안의 손짓이었다. 바람이 불어 한겨울이더니 바람이 불어 봄이로구나.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절이었고, 네가 아니라 나였다. 만개했던 매화 꽃잎이 비에 젖어 구겨진 채 바람에 날린다. 이 봄에는 꼭 꽃구경도 하란다. 산에 올라 진달래도 보고 꽃길도 걸으란다. 가고 오지 않음만 일일까. 잔도 없이 찬도 없이 무어라 무어라 자꾸만 권주가를 부른다.

봄꽃

from text 2022/03/14 08:47
부질없는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봄, 너는
불꽃이로구나.
부질없는 것을
부질없게 만드는
너는 불꽃이로구나.

어떤 소식

from text 2022/02/28 11:37
많은 일들이 그렇듯 좋은 줄 몰랐던 그때가 좋았다. 돌아보면 지금도 그때가 될 것이지만 더는 젊지 않으니 어쩌랴. 마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송창식의 잊읍시다를 느리게 느리게 불러 본다. '간밤 꾸었던 슬픈 꿈일랑 아침 햇살에 어둠 가시듯 잊어버리고, 함께 피웠던 모닥불도 함께 쌓았던 모래성도 없던 일로 해 두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금씩 다시 찾자고' 천천히 천천히 불러 본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표가 난다. 잘 감출수록 잘 드러나는 법, 가는 겨울도 슬픔을 아는 것인가. 터지는 매화 꽃망울이 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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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꿈

from text 2022/02/13 09:12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들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싱글 몰트와 함께한다. 생계는 아름다우나 인생은 슬픈 것. 황금의 물결을 따라 나비떼가 난다. 이나무, 팽나무, 좀작살나무. 바닥 없는 곳으로부터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럿 가운데 하나여도 좋아라. 그래, 아끼기 힘든 것이 어찌 너만이랴. 아낌 없는 마음도, 아끼는 마음도 좋아라. 이 절기에 핑계가 더 필요할까. 다만 잔을 들어 가고 오는 일을 기릴 뿐.

올해도 바싹 마른 봄이 오려나, 유난히 겨울 가뭄이 길다. 그해 가을 같은 날이 올까. 오래된 나무 향에 취해 나무가 꾸는 꿈이 되었다가, 낯선 꿈이 슬퍼 오늘은 오래 울었다.

어느 저녁

from text 2022/01/12 21:43
술이 고픈 저녁, 그림자처럼 길게 몸을 끌며 지나간 이들을 생각한다. 바람이 분다. 겨울 칼바람도 느린 걸음을 재촉하지 못하고 하나둘 불을 켜는 가게들을 위협할 따름이다. 지나간 일들이 지나간 이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다만 술이 고픈 저녁, 겨울 해는 짧아 어째 설움이 긴 것인가. 오늘 마시지 못할손 다시 마시지 못할까마는, 부질없이 마음은 바쁘고 걸음은 더욱 느리다. 지난날처럼 아무데고 혼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지도, 다 늦은 시간에 누구를 부르지도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지나간 이들과 지나간 길을 길게 걷다 보면 마치 여러 사람과 번갈아 술잔을 주고받은 것처럼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도 한다. 가장 먼 길을 가장 길게 걷다 보면 고픈 술을 달래고 지난날처럼 훗날을 기약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쯤이면 길 끝에서 다시 바람이 불고, 시린 눈에는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저녁이 곱게 저문다.

지난날처럼

from text 2022/01/04 20:05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자리가 있고, 아무리 버텨도 취하는 자리가 있다. 역사는 술이 덜 깼을 때 일어나는 법. 오늘처럼 내일도 평온하리니, 누군가를 기다리다 만난다는 건 젊음처럼 분에 넘치는 일이어라. 누군들 다른 삶을 꿈꾸지 않으리오마는, 낭만이라는 게 있던 시절에도 누구나 낭만적으로 살 수는 없었지. 술잔도 그대 따라 저무네. 새로울 일 없어라. 꿈도 취기요, 취기도 다른 꿈이었을 뿐. 지난날처럼 기꺼이 한 잔 보태노니, 한 점, 한 곡에 또 한 세월 가누나.

보고 싶은 얼굴

from text 2021/10/31 15:52
어쩌다 보니 담배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꼬박 일 년이 지났다. 끊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라 그저 한번 안 피워 보자 했던 것이 그렇게 되었다. 아직 책상 서랍에는 뜯지 않은 담배 두 갑과 일회용 라이터가 있다. 술은 지금도 가급적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대체로 절반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횟수는 줄고 먹을 때 양은 오히려 늘었달까. 생각해 보면 몸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니 기실 바뀐 게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만.

며칠 넷플릭스에서 인간실격을 몰아 보았다. 자의식 과잉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저씨 이후 모처럼 드라마 속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보는 내내 끝까지 다 보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지 생각하였다. 이제 이 세계가 낯선 걸 보면 거기서 긴 세월을 보낸 게 틀림없다. '붉은 꽃그늘 아래서 꽃인 양 부풀었던, 남겨진 혼잣말'들에 복 있을진저. 할렐루야.

* 인간의 자격 /화의 나라 /투명인간 /사람 친구 /이름 없는 고통 /아는 여자 /Broken Hallelujah /다윗과 밧세바 /세 사람 /제자리 /금지된 마음 /유실물 /모르는 사람들 /인간실격 /마침표 /별이 빛나는 한낮

청춘

from text 2021/10/21 15:38
세상에는 멀거나 가까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어중간하거나 적당한 것도 있는 거지. 불현듯 겨울이 찾아온 시월 중순, 스산한 마음에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한가득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과 주인을 찾지 못한 말들이 거기 있었구나. 술 한 모금에 기억 한 자락씩 흘려보낸다. 남은 기억이 얼마일까. 찬바람에 손을 내밀다 뭉툭하게 끝이 잘렸다. 잠은 줄고 졸음이 늘었다. 부질없이 가는 게 있을까. 떠난 자리는 비는 것인가. 짧은 가을, 가는 세월에 건배.

가을비 오는 날

from text 2021/10/11 19:40
밤새 기온이 10도 이상 뚝 떨어지더니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린다. 여름이 가을로 가는 결정적 길목을 목도한 기분이다. 어쩌다 너는 그 반지를 그 못에다 던지고, 나는 전당포에다 맡기고 찾지 않았을까. 너를 잊으려다, 너를 잊으려던 나를 잊어버렸을까. 시간만 의미가 없어진 게 아니다. 의미가 있었던 것이 죄다 사라져 버렸다. 굳은살 배긴 발바닥의 기억도, 발굴 현장의 붓자국과 노오란 플레어스커트의 나풀거림도. 빗길을 구르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네 목소리는 들리다 말고, 너는 천천히 내리다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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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from text 2021/10/08 11:17
길어진 저녁, 늦더위 내린 도시의 거리가 새삼스럽다.
시절이 수상한들 세월이 야속한들
계절은 또박또박 구월을 지나 시월로 가고
세모장식, 태성설비, 훈이네분식, 가나헤어살롱
하고많은 간판들을 지나다
인테리어가 한창인 새 이발소 간판을 만났다.
이 시국에 새로 문을 여는 이발소라니
지나갔다고 다 지나간 게 아니구나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하며 박수를 보냈다.
저녁 길은 내리막길
물기 없는 바람이 불고
꽃처럼 잎이 지고,
사무치는 마음이 갈 곳을 모르겠다.

녹슬은 해방구와 강매

from text 2021/10/04 11:07
이 두 노래를 기록하고, 기억하자. 조국과 청춘의 녹슬은 해방구와 윤연선과 윤선애가 부른 김의철의 江梅. 먼저 녹슬은 해방구.

그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앞서간 죽음 저편에 해방의 산마루로 피었지
그해 우린 춥지는 않았어 동지들 체온으로
산천이 추위에 떨면 투쟁의 함성 더욱 뜨겁게

산 너머 가지 위로 초승달 뜨면 멀리 고향 생각 밤을 지새고
수많은 동지들 죽어가던 밤 분노를 삼키며 울기도 했던
나의 청춘을 동지들이여 그대의 투쟁으로 다시 피워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 해방의 약속을

그리고 강매. 내/네는 임의로 손을 보았다. 내 정서에는 이게 맞다. 윤연선은 나 홀로 강가에 피었다 사라져 갈 이름이여로, 윤선애는 너 홀로 강가에 피었다 사라져 갈 이름이여로 불렀다.

내 이름은 외로워 나비도 벌님도 볼 뉘 없어
나 홀로 강가에 피었다 사라져 갈 이름이여
너를 찾아 헤매이다 나의 외로움만 쌓이고
스러진 꽃잎을 찾으려고 등 뒤 해지는 줄 몰랐네
불러도 대답은 간데없고 휘몰아치는 강바람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말라버린 풀그루를 지나
단 한 번 미소를 줏으려고 그래서 내 이름은 강매라네
단 한 번 그 향기 그리워 그래 내 이름은 강매라네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수줍어 고개 숙인 그대여
님의 맘 다 타버려 재 되어 사라질 날 기다렸나
어제도 오늘도 동틀 제면 너를 찾아 헤매었네
저녁 해 먼산에 걸리어 외로움에 타버렸네
불러도 대답은 간데없고 휘몰아치는 강바람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말라버린 풀그루를 지나
단 한 번 미소를 줏으려고 그래서 네 이름은 강매라네
단 한 번 그 향기 그리워 그래 네 이름은 강매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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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from text 2021/09/12 19:08
날이 갈수록을 들으며 글렌캐런 잔에 발베니를 따르고 절인 올리브를 곁들인다. 황금을 삼키는 동안, 여러 가수의 여러 음색을 따라 시름이고 세월이고 저만치 물러난다. 가을이요, 몰락이다. 이 밤은 그래, 반복이다. 충돌로 파멸이어도, 다시 별이 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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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보내며

from text 2021/08/14 20:56
최백호의 가을 노래들을 반복해 듣는다. 가을 바다 가을 도시와 가을의 여인이 특히 좋다. 가을에 형체가 있고 소리가 있다면 딱 최백호의 외양에 그 노래겠다. 마침 올해는 가을도 일찍 올 모양이다. 봄이 길고 여름이 늦었으니, 겨울이야 언제 온들 어떠리. 길고 짧은 하루하루, 무거운 정신으로 가볍게 살아야지. 점심으로 생선 한 마리 들어가지 않은 민물새우 매운탕을 먹었다.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일품이었다. 가을에 맛이 있으면 이런 맛일까 생각하였다. 다시 몸도 좀 가볍게 가질 생각을 하였고, 적응을 하는 거겠지, 다 잘 보이지 않아도 괜찮구나 생각도 하였다. 진짜 나이를 먹는 걸까. 많은 데서 위화감이 없다. 어쨌든, 잘 가라,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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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아래에서

from text 2021/08/09 16:01
가을이 행복을 만나 그렇게 울더니 겨울이 오기 전 겨울 몰래 숨었더라. 봄이 오기 전에는 겨울도 같이 봄 몰래 숨었더라. 여름에는 가을, 겨울, 봄이, 가을에는 겨울, 봄, 여름이 그렇게 서로 숨었더라. 사연일랑 계절 너머 보내리. 몸서리치게 푸른 밤, 푸르러서 좋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