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결심 2 2016/10/09
  2. 지난여름 2016/09/22
  3. 여름밤 2016/08/15
  4. 젠틀맨에 대하여 2016/06/19
  5. 다른 계절 2016/05/25
  6. 봄이 진다 2016/04/21
  7. 오래된 농담처럼 2016/03/05
  8. 러너 2016/02/12
  9. 촉루처럼 2016/02/08
  10. 배웅 2016/01/27
  11. 돌아보면 2016/01/26
  12. 룸펠슈틸츠헨을 위하여 2016/01/10
  13. 결심 2015/12/30
  14. 다른 우주 2 2015/11/25
  15. 소설 2015/11/23
  16. 꽃무릇을 두고 2015/11/09

결심 2

from text 2016/10/09 11:22
삼십 년 꼬박 마시고 피워댔으니, 그만 적당히 즐길 것. 항상 제 정신을 유지하고, 가급적 몸을 움직일 것. 화를 자제하고, 스스로 가꾸며, 서로 존중하고 칭찬할 것. 지킬 것은 지킬 것.

* 제대로 가을, 마침 면세 담배가 똑 떨어진 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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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from text 2016/09/22 20:25
나도 그렇다, 말하고 싶었다. 그만 진화를 멈추고 싶었다. 무언가를 저지르기에 나이는 늘 너무 많거나 적었다. 돌이킬 수 없는 그때, 충분히 적었고 넘치게 많았을 그 날들을 어째서 주춤거리기만 했을까. 내가 좀더 근사한 사람이면 나았을까. 응력이 다하기 전, 가슴 한구석에서 뭐라도 한 덩이 덜었으면 좋았으리라. 뭔들 시시하지 않을까. 가을 바람 한번에 지난여름이사 가뭇없구나.

여름밤

from text 2016/08/15 16:22
취하지 않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더만, 취하지 않고는 계절 하나 나기 쉽지 않구나. 이제 더는 아무렇게나 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지난밤에도, 여전히 그리운 건 함께 취하던 당신이었다. 술잔의 수위처럼 차오르던 내 오랜 동무들이었다. 다 걸고 다 잃은 자의 심정으로 살았다. 뜨거운 바람이 이르길 돌아갈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한다. 이 계절의 밀명은, 동작 그만, 다가올 적막의 시공 앞에 모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모른 척, 한 오백 년 살 것처럼 다음 계절에나 귀를 기울일밖에.

젠틀맨에 대하여

from text 2016/06/19 23:37
글쎄, 내 생각은 이렇다.

의관을 정제할 것.
누구든 배려할 것.
매사에 숙고할 것.
조용히, 갈 길 갈 것.

* 인정하자. 너는 더 이상 첨단이 아니다. 지금 죽을 게 아니라면 노래를 멈추어라.

다른 계절

from text 2016/05/25 22:50
다른 계절이 오면 다른 꿈을 꿀 테다. 다른 세상을 맞아 다른 사랑을 꿈꿀 테다. 바람이 지난다. 바람 곁을 바람처럼 지난다. 오랜 옛날, 나는 내가 아니었다.

늦은 소식이 제 힘으로 제 소식을 만든다. 아무도 감응하지 않을지라도 혼자 소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니다. 비가 내려도, 술을 마셔도 다시 만날 수 없다.

무엇이든 끝 간 데를 상상했다. 미웠던 만큼 마음을 다한 거다. 더는 알 길이 없다. 술을 먹고 나면, 우주에 나선 것처럼 사람들이 작고 예쁘게 보인다. 난데없이 눈물이 난다. 그래, 갈 길 없는 거다.

교복을 입은 큰아이를 본다. 독립된 인격체에 벌써 세월이 묻어 있다. 오월이 간다. 여름이 가고 지난날의 내가 가고 너와 나의 인생이 간다. 기억이야 무관하리. 온 데로 돌아가니 저어할 일 없어라.

봄이 진다

from text 2016/04/21 11:17
봄이 진다. 잊지 못할 사랑과 네 눈동자.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뿌리로 돌아가거나 떠난 가지를 그리워하지 않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틈을 타 먼 곳으로 떠나리라. 적멸보궁으로 숨죽인 나비가 날았다. 그저 한때 나는 끈적이는 손으로 부푼 솜사탕을 탐한 것이었다. 가볍게 태어날 줄 몰랐고, 이렇게 세상이 흐를 줄 몰랐다. 이번 봄은 길었다. 너를 두고, 다시 오지 않을 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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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처럼

from text 2016/03/05 14:53
입춘 지난 지 오래고, 사무실 앞 매화는 절반이 만개하였다. 오래된 농담처럼 나와 함께 성장하였던 금언. 무엇에든 구애되지 말자고, 마침 비오는 날을 잡아 한잔하였다. 어제, 금주 칠십일 일째.

술을 안 먹는 동안 농반진반으로 주위에 한 얘기가 있다. 이렇게 간절히 봄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나 하는 것과 가능한 한 길게 기록을 세워 다시 도전할 엄두도 못 내게 하겠다는 것. 가장 많이 생각한 건 아마도, 다시 술을 마신다면 천천히 조금씩 즐길 수 있을까, 여전히 잦은 폭음을 하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조금씩 즐기되 그만한 일이 있는 어떤 날엔 대취하도록 먹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곤 내심 좋은 생각이라고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곧 그것이 술을 마시는 동안 내내 했던 허튼 결심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 파괴적으로 살지 말자는 다짐.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아도 진실하고 충만할 수 있다는 깨달음. 아이들에게 본을 보이고 믿음을 얻었다는 것. 갈수록 엉망인 세태에도 세상이 조금 더 예뻐 보인다는 것. 아무튼 무거운 짐 하나 던 기분이다.

여럿 궁금해 하더라만, 술을 끊은 이유는 별 거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 뭐 다시 먹는 이유도 같다.

러너

from text 2016/02/12 23:18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지 오십 일. 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린 금요일. 큰일 하나 치른 날이자 갈 사람과 올 사람이 있던 날. 이월에 이렇게 따뜻한 날이 있었나. 누가 조금만 더 찔렀으면 바로 술잔 위에 엎어졌을 거다. 한 번만 더 낚았으면 황천길이 빤히 보여도 덥석 물고 놓지 않았을 거다. 핑곗거리도 좋겠다, 내친걸음 한 일백 일은 채우리라던 장담도, 육십오 일을 버텼던 그전 기록을 갈아 보겠다던 욕심도 간단히 무너졌을 거다. 잘 참았다. 괜한 결심일 리 없다. 먼저 먹자기엔 영 계면쩍어 묵묵히 돌아오던 길, 반환점을 돈 장거리 러너가 된 기분이었다. 그만하면 되었든, 이제 시작이든.

촉루처럼

from text 2016/02/08 22:32
그럴 때가 있었다. 누군가 날 이해할 날이 올 거라고, 언젠가 나도 세상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던 때가. 여전히 죽음은 그에게 우주의 소멸일 뿐이지만, 나에게 그것은 어떤 생성일지 모른다. 우주에게는 다만 큰 슬픔일지도 모르겠다. 젠장, 믿는 걸 바라기보다는 바라는 걸 믿는 쪽이 된 건가.

어쩌다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보면 내가 저기 살고 있구나, 그저 촉루처럼 무너지기도 한다. 소멸 너머 무럭무럭 자라기도 한다. 불완전 연소의 꿈이 완전 연소일 리가 없다. 꿈을 꾸지 않을 도리가 없을 뿐.

배웅

from text 2016/01/27 23:38
출근길, 잠시 걷다가 건너 차선에 정차한 노선버스를 보았다. 드문드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알리아처럼 흔들리며 창밖을 응시하였고, 시선의 끝에는 어쩐지 더운 바람이 불었다. 차창에 낀 얼룩이 제멋대로 서로를 이었다가 갈랐다. 뭘 남기거나 더하지 마라. 찰나에 겁이었던 세상은 정해진 신호에 다시 움직였다. 하등 관계없어 그럴 테지. 정든 걸음을 멈추고 하릴없이 떠나는 세상을 멀리 배웅하였다. 먼눈으로 오래 지켜보았다.

돌아보면

from text 2016/01/26 16:37
돌아보면 늘 어리고 어리석었다. 간혹 기린을 본 원숭이처럼 두리번거리며 흉내나 냈을 뿐이다. 목을 길게 빼고 눈치나 살폈을 뿐이다. 운이 따라 이만큼이나마 온 게다. 조상의 은덕을 입고 주변에 해악을 끼쳤다. 돌아보면 더 어리고 어리석을 일만 남았으니 우선 관계를 단절하고 말을 삼갈 일이다. 빛났던 만큼 아직 너와 나는 참혹할 따름이다. 금주 삼십삼 일째, 겨울 해가 점처럼 오도카니 들어앉았다. 누가 그 자리 봄을 멀리 밀쳐놓았다.

룸펠슈틸츠헨을 위하여

from text 2016/01/10 21:13
값이 오른 담배를 단 한 갑도 사지 않겠다는, 돈도 돈이지만 이 정부에 이걸로 세금을 더 내지 않겠다는 지지난해 말 결심을 완벽히 이행하고 있다. 끊은 건 아니고 적당히 줄이면서 제주도나 해외를 오가는 지인들에게 면세 담배를 공급받은 것이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모든 식당 금연을 비롯한 금연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를 나름대로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눈치는 빤한가. 올 하반기부터 제주도의 내국인 면세점에서 담배를 취급하지 않는다 하니 그때쯤에는 대폭 줄이거나 아예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주 찾는 황현산의 트위터에서 금연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생각난 것.

올해 두 아이가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진학한다. 0124님은 마흔을 바라보고 나는 곧 쉰을 바라볼 테다. 뚜렷한 답이 없이 갈수록 고민만 많던 첫째의 바둑은 당자의 뜻을 따라 또 일단 가 보기로 한다. 뭘 해도 어리게만 보이는 둘째는 어째 걱정이 앞선다만 타고난 운수를 믿어 보기로 하고. 선택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다 제 몫이 있는 거라면 결국 제자리를 찾을 게다.

금주 십칠 일째, 신기할 정도로 술 생각이 그리 심하지 않다. 다음은 세계의 동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편의 동화와 민담)에 실린 그림 형제의 룸펠슈틸츠헨 마지막 문단. 난쟁이, 룸펠슈틸츠헨이 뭔 죄란 말인가.

난쟁이는 울부짖으면서 분을 이기지 못해 오른발로 땅을 쾅쾅 내리쳤다. 그 통에 난쟁이의 몸뚱어리가 허리까지 땅 속에 박혀버렸다. 그러자 난쟁이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번엔 두 손으로 왼발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난쟁이의 몸뚱어리는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결심

from text 2015/12/30 22:56
또 한 해가 간다. 언제이던가.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시간에 구애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결심도 늙고 나도 늙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소회가 전 같지 않다. 세상을 더 살아 그리 보이는 건지 실제 그런 건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새삼스럽고 팍팍하기만 하다. 우리가 보는 과거는 과거에 과거를 보았던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아무려나, 좋은 기억만 갖고 갈 순 없겠지. 어쨌든. 결심 같은 건 안 할 결심 말고, 몇 가지 결심. 하매 안 먹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만, 무엇보다 먼저, 꽃 피는 봄이 올 때까지 술을 멀리하겠다. 그리고 몸을 쓰고, 볕도 좀 쬐어야겠다. 아침저녁 팔 굽혀 펴기라도 꾸준히 하고 다시 좀 걸어야겠다. 말을 아끼고, 더듬더듬 세상과 주변을 돌아봐야겠다. 아이들이랑 많이 놀고, 어른들을 자주 뵈어야겠다. 그래, 숨도 좀 천천히 쉬어야겠다. 작은 설, 동지를 지나며 안 먹던 팥죽도 먹었으니 나이도 제대로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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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우주 2

from text 2015/11/25 11:45
어제 가을의 끝을 붙잡고 한잔했더랬지요. 내가 놓아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오는 길에는 겨울이 와 있습디다. 술집에서는 모처럼 생각의 여름과 김윤아를 청해 들었습니다. 만삭의 젊은 안주인은 무엇이 즐거운지 내내 웃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각자 자기만의 하루를 털어내고 있었지요. 나는 다른 우주를 꿈꾸었답니다. 기억을 더듬었더니, 거기, 남겨두고 돌아왔던 내가 있습디다. 부서진 돌가루처럼, 아직도 남아 있습디다. 꽃을 거들듯 짐짓 향만 사르고 못 본 체 돌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아쉬웠던지 일행을 데리고 굴 속 같은 집으로 들어와 기어이 고꾸라지고 말았지요. 이 아침에는 비가 오고 쌀쌀한 바람이 붑니다. 나는 언제나 미더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긴 굽은 것도 곧은 게 모인 것이고, 곧은 것도 들여다보면 저마다 굽어 있을 겁니다. 점심, 든든하게 챙기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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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from text 2015/11/23 22:42
절정에 이르러 너를 만나지 못하였다. 빨간 원피스, 가지런한 두 다리에 눈이 멀었다. 보고 싶었다. 글쎄, 세상은 아름답지도, 추하거나 흉하지도 않더라. 올가을은 유난히 길었다. 일찍 와서 끝내 버텼다. 마르게 시작하여 오래 눅눅하였다. 내내 흐리거나 비를 뿌렸다. 몇몇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고, 나머지는 애써 돌이키지 않았다. 서둘렀던 꽃무릇은 지난가을이 더 야속했을까. 보내거나 남은 이들은 무사하였을까. 코스타리카 따라주를 들고 옅은 현기증과 미열을 즐긴다. 철새 같은 음악이 흐르는 통창을 두고 안팎이 나뉜다. 풍경일 때, 거리를 둔 사물일 때 비로소 네가 궁금하다. 금방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만 같은 하늘, 오후 네 시가 저문다.

꽃무릇을 두고

from text 2015/11/09 16:52
안경을 벗고 홀로 자리에 누우면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왼쪽으로 잠시 뒤척이면 금세 일이십 년을 거스르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먼 앞날이 문득 다가선다. 이도 저도 싫어 똑바로 천장을 향하면 그때의 내가 빤히 떠 있다.

가을이 저문다. 가을이 저물어 네가 울고, 네가 울어 날이 저문다. 산이 무너진다. 가위도 정이 드는가. 나는 두려움이 두렵다. 길은 몇 갈래, 너를 두고 이 길을 간다. 푸르게 꽃무릇을 밟고 간다. 마음이 지척이라 가는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