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대회

from photo/D50 2009/05/24 21:52
역시 강호엔 고수가 많았다. 영남이공대학 천마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대구시장배 전국 바둑대회 유치부 경기. 조별 리그로 치러진 예선은 겨우 통과하였으나 본선 16강 토너먼트에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팔 개월 배운 실력에 처음 나가본 대회, 대진운까지 크게 기대할 여건은 아니었으나 저도 나도 내심 벼르던 경기였는데 많이 아쉬웠다. 내내 같이 흥분 상태였으나 녀석은 나보다는 한 수 위였다. 시작 전 개회식 때에도 잔뜩 긴장하는 건 나였고, 대국 때에도 녀석은 설렁설렁 두는데 보는 나는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끝나고 나서도 속이야 어떻든 담담한 녀석과 달리 집에 돌아와서까지 괜스레 분하고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은 나였다. 한껏 부풀어 있다 실망하여 힘들어하면 어쩌나 했던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녀석은 잠들기 전 잠깐, 오늘이 금요일이었으면 그래서 내일도 쉬고 대회도 하기 전이었으면 하고 속내를 설핏 비추고는 마는 것이었다. 그 작은 가슴에 헤아릴 길 없는 무언가가 자리 잡(히)고 있는 모양이다. 녀석, 자꾸 나대기만 하는 것 같아 걱정이더니 좀더 그냥 내버려두어도 좋겠다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Tag //

발자국

from text 2009/05/24 01:50
한 사나이가 갔다. 한 시대가 가듯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해 따라 날 저물 듯 스스로 걸어갔다. 공화국의 등짝에 선연한 발자국을 남기고 그렇게 갔다. 신동엽의 '散文詩 1'로 온종일 먹먹하던 가슴을 달래 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담배 있나',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든 그렇게 걸어간 마지막 길을 그보다 더 잘 상징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담배 한 대, 끝내 보류해 둔다마는 향 사르듯 사를 날을 또한 기약한다.

from text 2009/05/09 23:47
어제오늘 통영에서 뱃길 사십오 분 거리의 욕지도에 다녀왔다. 기억 속의 남해섬에 비길 바는 아니었으나 고즈넉하고 예쁜 섬이었다. 풍경을 잘 찍지 않는데다 일행(나까지 노소 남자 일곱 명)을 담을 일은 더욱 없겠다 싶어 귀찮은 마음에 사진기를 챙기지 않았는데 막상 담고 싶은 풍광이 많아 아쉬웠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선상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점점이 박힌 섬들까지 그대로 담백한 수묵화였다. 섬은 황토색 비탈밭과 색색깔 지붕을 인 낮은 집들이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곱기 이를 데 없었으나 관광버스와 사람들, 이국적인 펜션들로 어지럽기도 했다.

숙소 주변에서는 모처럼 바닷가 낙조를 즐길 수 있었다. 내 속 어딘가도 새빨간 자국을 남기고 해가 지자마자 건너편엔 하얗게 달이 떴는데, 아침이면 저기서 다시 붉은 덩어리가 떠오르겠거니 했다. 시뻘건 초고추장에 날것 그대로의 앙상한 욕망을 나눈, 저마다의 봄밤, 보름을 하루 앞둔 달이 하도 밝아 별은 보이지 않는데 바다에 부서진 달빛은 천 갈래 만 갈래 제가끔 먼 곳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돌아올 때 보니 육지도 너도 하나의 섬이더라. 곱고 어지러운 하나의 파멸이더라.

헤아려 보니 육십일 일째 술 한 방울 담배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이런 걸 세는 걸 보니 다시 먹을 날이 머지않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 육십오 일째 되던 날, 제대로 먹고 말았다. 그리운 봄밤, 보배로우면서도 참혹했다.
Ta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