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from text 2010/10/16 11:43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을 재미있게 읽었다. 늙어서 꼭 다시 펼쳐보아야지 하면서, 옛날에는 좋았겠다 그랬다. 전시륜보다 멋진 여자들이 넘쳤다. 스무 살 무렵 들은 선배들 이야기가 있다. 미팅이라도 할라치면 때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자리도 있는데 그럴 때면 상대가 자신이 벗어놓은 신발을 꼭 돌려놓아 주곤 했다는 얘기다. 그 세대는 그랬단다. 그게 통하는 예의였단다. 삼사년 된 일이지만,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자리에 같이 들어가던 이가 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아 주거나 나란히 신발장에 넣어주던 일이 있었다. 그 손매가 마음만큼이나 예뻤다. 그 마음을 통째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한세상 살다가는 것이 무에 그리 잘나고 지랄난다고 속 쓰고 애태우는지 모를 일이다. 갈데없는 영혼들은 스스로 제 몸을 갈 데까지 밀고 가기도 한다. 찬 바람은 거짓말 같던 여름을 밀어내고 가뭇없이 가버린 것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게 주저앉아 울던 어떤 것들은 떨어져 꽃잎이 되기도 하였고, 가만히 토닥이는 손길에 놀라 달아나기도 하였다.

새벽 네 시, 돌아오는 길목들은 죄다 낯설었다. 내가 제 모습으로 세상을 보는지 세상이 비로소 제 모양을 드러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오랜만에 가이아가 뒤척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풰스튀봘에게 경배를.

꿈, 가을

from text 2010/09/26 17:05
꿈을 꾸었다. 외딴 변기에 갇힌 꿈. 사타구니를 휘감아 흐르는 물뱀의 서늘함과 미끈함이 오랜 친구 같았다. 가을빛이 이리 시리건만 거기, 물 밖 꿈들은 대체로 안녕한지, 다시 피었다 지기도 하는지, 묻는 말에 거품만 부글거렸다. 대답할 길이 없었다.

가을이다. 결코 정을 나눌 생각은 없지만 최악의 인간상에 어느 정도 적응도 되었고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게 되었다. 수확이라면 이른 수확이다. 피폐한 중에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를 읽고 몇 권의 책을 주문하였으며, 마루 밑 아리에티, 슈퍼 배드, 무적자, 해결사 등을 보았다. 사진이야 찍거나 말거나 작고 예쁜 디지털 바디가 소원이더니 후지필름이 포토키나 2010에서 발표한 파인픽스 X100 때문에 모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내년 3월은 되어야 출시될 모양이니 그전에 나올 여러 모델들과 비교하며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여전히 사는 건 녹록치 않고 간밤 꿈에 낮으로 시달리기도 하지만, 가을빛을 보니, 세상은 참으로 지내볼 만한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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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from text 2010/08/18 21:39
비가 달라졌다. 기후가 바뀐 것이든(TV, 에어컨, 차 없이 잘(?) 살고 있으나 이참에 에어컨은 장만할 생각이다. 올해도 여러 번 망설이다 그냥 지나가지만 내년에 다시 오락가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적어둔다) 원래 그런 것이었든 지금껏 알고 좋아하던 그 비는 아닌 게 분명하다. 가벼운 인두염인 줄 알았더니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아 소아병원에 입원한 서율이를 두고 집으로 오던 길, 우산을 들고도 시장 네거리 마트 앞에 서서 비를 피하며 그 생각을 하였다. 늦은 밤, 저녁을 굶은 속에 들이키는 깡통 맥주는 저 혼자 출렁거렸고 포도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길대로 흐르기를 거부하였다. 모퉁이를 돌아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제멋대로 내달렸다.

지난 일요일 서연이와 오션스를 보았을 때, 그게 다 존재가 외롭고 슬퍼서 그런 거라 했었다. 바다 생물들이 떼를 지어 어떤 형상을 만들고 무리지어 내달리거나 거대한 몸체를 솟구치며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술을 먹고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거나 어두운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몰래 울음을 토해내는 모습을 닮아 있다. 그렇게 취하고 소리 지르며 울거나 알아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거기 있는 것이다. 스크린 너머, 짐승의 젖은 눈망울 속에는 비리고 날 선 우리의 욕망과 거울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또 다른 초상이 교차하고 있었다.

몽골 여행 전후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을 읽었다. 진작 이 흥미롭고 감미로운 책을 제목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읽다 발견하고 할끔할끔 핥아 읽었다. 무엇이든 탐독하던 한때처럼 밑줄 그을 일이 많았다. 다 밑줄을 칠 순 없는 노릇이라 아껴가며 읽는 맛이 더했다. 이 사유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유를 들먹이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일일 것인가. 자라온 지난날과 그에 비추어 앞날을 반추하는 것보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가 스스로와 세상을 더 끔찍하게 만들기도 하였다.